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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 파탈’ 그녀를 어쨌든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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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 파탈’ 그녀를 어쨌든 사랑했다
  • 세종포스트
  • 승인 2014.03.3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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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오리지널 오브 로라’

두 남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왼쪽)와 그가 인덱스카드에 쓴 <오리지널 오브 로라>의 초고. '배반당한 유언'에 의해 빛을 보게 된 이 원고를 타임은 ˝소설이 아닌, 밀로의 비너스처럼 아름다운 잔해˝라고 불렀다. ⓒ문학동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왼쪽)와 그가 인덱스카드에 쓴 <오리지널 오브 로라>의 초고. '배반당한 유언'에 의해 빛을 보게 된 이 원고를 타임은 ˝소설이 아닌, 밀로의 비너스처럼 아름다운 잔해˝라고 불렀다. ⓒ문학동네

자신의 사후, 원고를 소각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 작가들은 낭만주의적 예술가의 한 표본으로 흔히 추앙 받지만, 밀란 쿤데라가 고국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유언에 대해 쓴 산문에서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그것은 일종의 직업적 프로페셔널리즘에 다름 아니다. 맨 얼굴의 리허설을 대중에게 결코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여배우처럼, 작가는 다만 완벽한 작품만을 자신의 저작으로 세상에 남기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 부류의 작가에 저 슬프고 아름다운 소설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가 추가돼야 한다.

<오리지널 오브 로라>는 러시아의 귀족 명문가에서 태어나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스위스 순으로 망명과 유랑을 거듭해야 했던 나보코프가 그 좋아하던 곤충채집을 하다 스위스 산비탈에서 굴러 떨어져 암울한 투병을 시작했던 해에 집필에 들어가 2년 후 세상을 뜰 때까지 138장의 인덱스카드에 메모한 소설의 초고다. 완벽한 문장들로 챕터가 완성된 곳이 있는가 하면 아이디어 차원의 단어만 나열된 곳도 있는 등, 그 자체로는 완벽한 문해가 불가능한 상태의 ‘창작노트’ 같은 원고이기에 나보코프는 아내에게 만약 자신의 임종 시에 이 책이 미완성인 상태라면, 그 원고를 소각해야 한다는 뜻을 못박아두었다.

하지만 저작권을 승계한 나보코프의 아들 드미트리는 오랜 망설임과 갈팡질팡 끝에 작가 사후 32년 만인 2009년 출판을 단행한다. 풍문으로만 존재하며 스위스 금고에서 잠자고 있던 이 소설의 위작 원고가 나도는 소동이 일고, 드미트리의 소각과 출판 사이에서의 모호한 태도와 번복이 언론을 통해 하나의 스캔들로 비화한 데 따른 결정이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1만3800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1만3800원

소설은 <롤리타>의 후일담을 쓴다면 그 주인공이 됐을 법한 ‘팜므 파탈’ 플로라와 그를 사랑하지만 결코 온전히 갖지는 못한 두 남자가 각기 서술하는 두 개의 서사로 구성돼 있다. 스물 둘의 플로라와 결혼한 50대 후반의 신경학자 필립 와일드와 그 몰래 플로라와 통정한 ‘나’가 바로 그 화자들이다.

‘죽는 건 재미있어’라는 가제처럼 소설은 곳곳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를 펼쳐나간다. 그것도 꽤 경쾌한 방식으로. "매력적인 외모 말고는 모든 걸 다 가진" 뚱보 와일드는 "의지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자기말소 과정", 즉 생각의 몰두라는 정신적 방법 통해 쾌감을 느끼며 죽음에 다다르는 방법을 연구 기록으로 남기지만, 결국 심장마비로 죽는다. 플로라와의 일을 <나의 로라>라는 소설로 쓴 '나'는 소설 속에서 그녀를 죽였지만, 3년 만에 다시 중부 유럽의 휴양지에서 그녀와 만나기로 돼 있다. 플로라가 ‘나’를 기다리는 기차역의 이름은 ‘섹스’다.

책은 나보코프의 인덱스 메모를 각 페이지의 상단에 그대로 실어 거장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관음의 기쁨을 선사한다. 나보코프는 소설의 전체상을 머릿속에 완벽하게 구상한 뒤에 인덱스 카드에 초고를 집필, 카드뭉치를 노상 들고 다니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작가였다. 수정이 끝나면 원고를 타이핑 시킨 후 인덱스카드는 스스로 집 뒤뜰 소각장에서 태우곤 했다. 그러니까 <오리저널 오브 로라>는 그 유명한 나보코프의 인덱스카드를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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