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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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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 김우영(소설가)
  • 승인 2014.03.17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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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리 /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中略). 1956년 이른 봄, 서울 명동 동방 살롱 맞은 편 허름한 빈대떡 집의 깨진 유리창 너머로 ‘세월이 가면’이 애잔하게 흘러나온다.

"주모, 술 좀 가져와." "또 외상?" 주모는 눈을 흘기면서 그 앞에 술 주전자를 새로 채워 식탁에 놓았다.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담배를 손가락에 낀 채 명동 동방살롱 문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상고머리의 그가 작사를, 이진섭이 작곡을, 우렁찬 성량의 임만섭이 노래를 부른다. 불후의 명곡 ‘세월이 가면’이 만들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빈대떡집이 이 노래의 첫 발표회장이 된 셈이다. 길 가던 사람들이 깨진 유리창 너머로 힐끗힐끗 이들을 보며 지난다.

그는 ‘세월이 가면’을 쓰고 나서 한동안 술로 세월을 보냈다. 부지런히 원고도 써서 몇 푼 원고료를 받았지만 집에 떨어진 쌀을 팔만큼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명동 백작으로 불리던 이봉구와 ‘신라의 달밤’을 잘 부르는 임궁재 등과 함께 하염없이 쓸쓸한 얼굴로 명동거리를 거닐며 국수 한 그릇에 술잔을 비우곤 했다.

‘세월이 가면’이 완성되던 날, 이진섭과 함께 어디서 그렇게 낮술을 많이 마셨는지 그의 얼굴은 이미 불콰해져 있었다. 단성사에서 상영 중인 <롯사노 브릿지>와 캐서린 헵번 주연의 <여정>을 보고 싶었으나 돈이 없었다. 그는 술집에 앉아 애처롭게 ‘세월이 가면’을 불렀다. 그리고 사흘 후 친구인 김훈에게 자장면 한 그릇을 얻어먹었다. 그리고는 술에 만취되어 집에 와 잠을 자다 31세의 아까운 생을 마감했다.

세탁소에 맡긴 봄 외투도 돈이 없어 못 찾고 두꺼운 겨울 외투를 그대로 입은 채였다.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눈을 감지 못하였다. 부음을 듣고 맨 먼저 달려 온 친구 송지영이 감겨 주었다. 생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못 사주었다면서 김은성이 조니워커 한 병을 체온이 싸늘하게 식은 그의 입에 주르륵 부어대자 다들 울었다.

그의 상여 뒤로 수많은 선·후배들이 따랐다. 공동묘지까지 따라 온 친구 정영교가 담배와 조니워커를 그의 관 위에 부어 주었다. 모윤숙 시인이 고인의 시를 낭송 하였고 친구인 조병화 시인이 조시를 읽었다.

그의 이름은 박인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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