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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구도에 힘이 실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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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구도에 힘이 실린 영화
  • 송길룡(영화칼럼니스트)
  • 승인 2016.05.26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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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노트 | ‘또 하나의 약속’

‘변호인’보다 한 발 더 나아간 ‘당사자주의’ 표방
피해자 장본인이 서사 중심축, 초점 살리는 효과

송길룡
송길룡

인간이면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 문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에 있다. 잘못을 저지를 땐 상황의 불가피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후에 그 잘못을 되짚는 것은 의식적으로 행하는 일이기에 분명히 태도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어쨌거나 한 사회의 도덕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책임을 묻되 그것을 진솔하게 시인하는 경우 정상을 참작해주는 아량도 보여준다.

그런데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행동은 과연 개인적인 태도의 문제로만 국한되는 것일까? 굳이 사회통계적인 근거를 들이대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회가 강자-약자 관계로 계층화돼 있는 경우 대체로 약자보다는 강자가 훨씬 더 자기 잘못에 대한 공개적인 인정에 인색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통용의 힘이 있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그것을 잘 나타내준다. 돈이 많은 사람은 바로 그 돈의 위력으로 자기 잘못을 묵인 받기 좋은 것이다. 그러니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는 말의 울림이 큰 것이다.

개봉일 훨씬 전부터 끊임없이 제작과정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약속>(김태윤 연출)이 2월초 개봉했다. 삼성반도체 산업현장에서 발병된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중증환자들 중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 씨의 사례를 모티브로 하여 극화한 영화다. 노동조합 없는 ‘한국대표기업’ 삼성으로부터 모종의 압력이 예상됐기에 더욱 큰 관심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일반적인 멀티플렉스용 상업영화들의 배급 규모보다 현저히 적은 상영관 개수로 출발한 이 영화는 비교적 높은 예매율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추가적인 상영관 축소 사태 속에 꿋꿋하고 꾸준한 관객동원을 보이고 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작년 말부터 올해 초로 이어지며 천만 관객 동원의 기염을 토하고 있는 영화 <변호인>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노정된 상황이기에 열악한 상영관 규모에도 남다른 주목을 받고 있는 분위기다. 국가폭력 피해자들로부터 인권변호사로서의 소명의식을 느끼고 기탄없이 활약을 펼치는 인물을 다룬 <변호인>은 재벌대기업의 무책임한 안전의식에 희생된 산업재해피해자 가족이 주역인 <또 하나의 약속>으로 이를테면 ‘사회파 영화’의 바통을 이어주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특히 ‘사회파 영화’에 반색하는 평자들의 무수한 감상문들이 한국사회의 경제구조를 훑어내는 방식으로 제출되는데 이것도 하나의 문화현상이 된 듯하다. 예전부터 그래왔지만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성취를 곰곰이 납득해보기도 전에 영화의 주제에 급격히 초점이 쏠리는 것은 ‘사회파 영화’의 운명과도 같은 일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그런 담론들의 유행이 가지는 순기능을 과히 평가절하할 일도 아니라고 본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를 만들어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영화니까 영화로 보는 관점을 취해보기로 한다.

비슷한 사회인식 내용을 담고 있는 그 두 영화들을 두고 가능한 한 영화비평 측면에서 비교를 하자면 <또 하나의 약속>은 중심인물 설정에 있어서 <변호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당사자주의’를 표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당사자주의란 어떤 사건이나 사태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장본인이 서사의 중심축을 이루도록 하는 창작방식을 말한다. 이런 창작방식에서는, 예를 들어 장애인 문제를 다룬다면 장애인이 중심인물이 되고 의사는 보조인물이 될 것이다. 교도소를 무대로 한다면 죄수가 중심인물이 되고 간수가 보조인물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은 전형적인 예로 제시된 것이고 주제 설정에 따라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또 하나의 약속>이 보여주는 당사자주의를 <변호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고 했다. <변호인>에서 공권력피해자는 당사자의 위치에 있지만 전혀 자구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다. 영화의 초점이 의기 넘치는 변호사의 변론에 맞춰지면서 그의 의뢰자는 무대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이에 따라 서사는 누군가를 돕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한 영웅에 의해 이끌려가게 되니 피해자 입장에서의 공권력남용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부차적인 것으로 남게 된다. 반면 <또 하나의 약속>은 산업재해피해자 가족, 정확히 말해서 피해자의 아버지가 능동적으로 자구적인 활동을 하며 여기에 노무사와 변호사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 영화는 자칫 과욕으로 넘칠 수 있는 노무사·변호사 연기 연출을 적절히 억제한 것으로 보이는데 피해자 아버지에 대한 촬영에 상당한 정도의 할애가 있다는 것이 근거다. 이는 이 영화가 담보하는 당사자주의를 적절히 뒷받침하는 장치로 작용하는데 여기서 도출되는 긴장이 영화의 흐름 속에서 초점을 잃지 않도록 하는 효과를 준다.

자 그러면 <또 하나의 약속>이 피해당사자를 전면에 내세워 줄곧 견인해내는 영화적 긴장의 속 깊은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피해는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라는 질문으로 압축된다. 과연 피해자의 잘못인가? 잘못이 가해자에게 있다면 과연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정녕코 뼈저리게 시인하고 있는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도 묵인된다면 이 사회는 과연 누구를 위한 사회인가? 이 영화가 설정과 서사를 통해 그 자체로서 이끌어내는 일련의 질문의 구도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감상법이라는 것을 지적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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