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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박탈감’의 확대재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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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박탈감’의 확대재생산
  • 석길암 교수(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 승인 2013.12.29 12: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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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그리고 사람살림 | 세밑 풍경, “안녕들 하십니까?”

삶의 요구 정책적 거부 느끼는 사람 늘어
최후의 안전망 종교계마저 ‘안녕’ 묻는 중
지속가능한 공동체 위태롭게 만들 우려 커


배고플 때 추운 것이 더 서러울까, 아니면 추울 때 배고픈 것이 더 서러울까? 어느 쪽이 더 서러울지 고민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쓸데없는 고민이 될 뿐이다. 배고픈 것과 추운 것이 함께 닥치면, 어느 것이 먼저인지 관계없이 죽음에 직면한다는 것이 정답인 까닭이다.

배고플 때 추우면 더 쉽게 굶어 죽는 것이고, 추울 때 배고프면 더 쉽게 얼어 죽는다는 정도가 차이랄까? 자의든 타의든 이 두 가지 중의 어느 하나라도 삶에서 맞닥뜨리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연스럽게라도 말이다.

해마다 연말이면 주변의 힘든 이웃을 위해 ‘온정’을 베풀자는 이야기가 두어 달은 관행적으로 지속되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든 라디오를 통해서든 아니면 신문지상을 통해서든, 그러한 이야기가 두어 달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주위를 되돌아보게 마련이었다. 물론 강요된 돌아보기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먹고 살기 힘든 시대의 풍경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의 십여 년 동안은 의례적인 그러한 연말풍경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세밑이 되면 또 하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었다. 인연 있는 지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 해의 삶을 되새기고 새로운 한 해도 아름답기를 바라는 모임을 만들곤 한다. 점잖은 이들은 송년회라고 칭하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망년회라는 말이 더 성행하는 연말풍경이다. 송년회라는 말 속에는 한 해 동안 다사다난했던 삶의 마무리를 잘 하자는 뜻을 담는데 비하여, 망년회에는 이것저것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한 번에 모아 잊어버리자는 뜻을 담는다. 그런데 그런 모습마저 잘 보이지 않는 이상한 세밑, 그것이 올해의 풍경이다.

유난히 올해 연말의 풍경이 이전과 달라 보이는 것이 필자뿐이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예전 같지 않은 그 풍경이 우울해 보이는 것은 필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도 올 연말을 강타하고 있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그렇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시작된 ‘안녕들 하십니까?’는 어느 새 전국의 대학가로, 고등학생까지도 포함하는 의사 표현의 중요한 방식으로 등장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우울하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니. 안녕하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80년대까지 우리네 인사법 중에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통용되었던 것은 ‘밥 드셨습니까?’였다. 식사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이 의례적인 인사로 통용되던 시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굶고 살았던 까닭에 그런 인사내용은 당연하게 통용되었다. 그런데 ‘안녕들 하십니까?’라니.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넘쳐나지 않고서야 그런 말이 유행까지 타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사실 그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는 오래된 것이고, 누구도 이상스레 반응할 필요가 없는 기본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그런 기본적인 인사법의 내용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너도나도 앞 다퉈 반응하고, 확대재생산하는 모양새다. 나도, 너도, 우리도 안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이제야 제대로 인식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80년대 이전 절대빈곤의 시대에 통용되던 인사법은 ‘밥 드셨습니까?’이고, 2013년의 세밑에 우리가 만난 인사법은 ‘안녕들 하십니까?’인 셈이다.

그런데 이 두 인사 사이에는 많은 간격이 존재한다. 상대의 절대적 생존 여부를 묻는다는 점에서는 두 인사가 동일하지만, 그것이 통용되는 시대가 전혀 다른 까닭이다. 80년대 이전 시대의 우리 사회는 절대적인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때였다. 그야말로 한 끼 식사의 여부로 상대의 안부를 충분히 물을 수 있는 시대였고, 그 외의 것은 묻는다는 것이 오히려 사치였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4년 세밑의 ‘안녕들 하십니까?’는 좀 다른 것 같다.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겠지만, 언필칭 ‘선진국’ 행세를 하는 대한민국 위정자들이 가득한 세상에 ‘안녕들 하십니까?’란 표현 자체가 어불성설인 까닭이다. 수없이 연말에 되뇌어진 ‘안녕들 하십니까’를 모두 쫓아갈 수는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말하는 골자는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박탈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래야 되는 것처럼 위장하여 받아들이라고 강요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인간으로서의 삶을 충족하기 위한 기본 조건에 대한 요구이다. 그것이 인위적으로 그리고 정책적으로 거부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안녕’을 묻고 있는 것이다. 2014년 세밑의 ‘안녕’에는 그런 의미가 또 묻어있다.

문제는 그 ‘안녕’을 요구하는 사람이 당사자들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체로 대부분의 사회에서 종교라는 존재는 그 사회 최후의 안전망에 해당한다. 어떤 사회에서든 ‘종교’는 대부분의 경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마지막으로 안착하는 의지 처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2014년 세밑 풍경은 그 종교계마저도 나서서 ‘안녕’을 묻고 있는 중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안녕’에 대한 요구가 상대적으로 좀 더 나은 것을 요구하는 ‘안녕’이 아니라는 점이며, 최소한의 안녕에 초점을 둔 요구라는 점이다. 그것이 정치적 요구이든, 경제적 요구이든, 최소한의 안녕에 대한 요구가 절박해지는 상황은 공동체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한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불교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세 가지 원인을 삼독으로 이야기한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그것이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 그것이 바로 탐욕이다. 내가 더 가지는 것이 당연함에 불구하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한다고 주변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을 보고 마땅치 않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냄이다. 내가 욕심내고 성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그것이 바로 어리석음이다.

대부분의 개인은 삼독을 잘 제어하지 못한다. 그래서 개인 간 다툼이 일어나고, 그런 개인 간의 다툼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장치 중의 하나가 바로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이다. 그런데 그 국가를 운영하는 주체가 삼독에 얽매여 불통을 자처하니, 공동체의 마지막 안전장치가 무너진 꼴이 된 셈이다. 그래서 ‘안녕’을 묻는 소리가 난무하는 세밑이다. 혼돈과 불만족스러움과 다툼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안녕’을 묻는 그 소리에는 기본적인 요구 혹은 바람이 들어있다. 때로는 가득 채우고 싶은 욕구로 가득한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꼭 하고 싶은 이야기, 이것만은 꼭 해결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실려 있다. ‘안녕’을 묻는 수많은 소리들은, 새삼 우리가 다른 이들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나의 바람’을 들어달라고 외치기에만 급급했던 우리가 ‘남의 바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세밑에 ‘안녕’하냐는 수많은 인사를 받았으니, 새해에는 주변에 ‘안녕’을 물을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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