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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속에 녹아든 위대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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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속에 녹아든 위대한 일상
  • 김선미(디트뉴스 주필)
  • 승인 2013.09.30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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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의 힘’과 나의 ‘웅천’

웃으면서 눈물 나는 능청 백단들의 인생 이야기

"야, 시상일이 한가지루다가 똑 떨어지는 벱은 절대로 는 겨. 사램이 뭔 일을 허잖냐? 그라믄 그 일은 반다시 새끼를 친대니께? 빨래헐라구 벗으믄 새끼 쳐서 목간허구, 푸지게 먹으믄 새끼 쳐서 설사허구 허는 거지. 그라니께 빨래허믄서 허이구 언제 목간허냐 걱정헐 것도 구, 먹으믄서 언제 싸냐 계산할 것두 다 이 말이여 내 말은!"-‘야코죽지 말어’

"남 서방, 그짝 말구 저짝에다 놔야 써!" "아녀, 저짝이라니께? 자빠지믄 코 닿을 텐디 그걸 더 못 가구!" 아 썩을 놈의 저짝. "남 서방, 인자 여나무 개 남았네." 아 썩을 놈의 여나무 개. 도대체 여나무 개는 몇 개길래 날라도 날라도 끝이 없단 말인가?.....저녁은 또 뭘 해 먹누. 그래 계란찜으로 정한다. 장인어른 좋아하는 새우젓은 조금, 아주 조금만 넣고 싫어하는 파는 듬뿍 넣어야지.-‘해방 사위 훼방 놓네’

‘충청도의 힘’ 남덕현 지음 | 양철북 펴냄 |
1만2000원

처음 일간지 책 소개 난에서 보고는 그냥 넘겼다. 그렇고 그런 책이려니, 무엇보다 제목으로 한몫 보려는 책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우연히 다른 이의 글에서 이 책이 언급된 것을 보고는 책을 구입했다. 책날개에 소개된 ‘무창포’라는 지명도 책을 선택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는 했다.

책은 한동안 책장을 차지한 채 있었다. 긴 추석연휴 기간, 잠자는 것도 지쳤을 때쯤 방안을 뒹굴다 드디어 책을 펼쳐들었다.

세상에나! 책은 ‘능청 백단들의 감칠맛 나는 인생 이야기’라는 설명이 과장이 아니라는 듯 만담과 개그를 무색하게 하리만치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 사투리로 점철된 시골 촌로들의 시시콜콜 일상사를 입담 좋게 엮어낸 남덕현의 <충청도의 힘>은 읽는 내내 배꼽을 잡게 만들었다. 그냥 "깔깔깔…" 배꼽만 잡게 했다면 ‘힘’이라는 책제목은 낚시질에 지나지 않았을 터.

글의 무대가 된 신비의 바닷길로 유명한 무창포해수욕장 인근의 달밭골 촌로들의 말투를 빌자면 그의 ‘글심(글힘)’은 거침이 없다. ‘웃으면서도 눈물이 난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질박하고 질퍽한 사투리로 털어놓는 이웃들의 사소하고 소소한 깨알 같은 일상사는 해학과 유머 속에서 사는 것에 대한 녹록치 않은 깨달음과 관조, 인생의 달관을 느끼게 한다.

지은이 남덕현은 대전에서 태어나 줄곧 19년을 살았고 서울로 대학에 가면서 24년 동안 서울살이를 하다 5년 전 처가의 터전인 충남 무창포 인근의 달밭골(월전리)에 정착했다.

그러나 마흔 너머부터 꿈꿨던 시골살이는 ‘시월드가 가고 처월드’가 대세라는 요즘 시류를 반영하듯 장인의 구박과 잔소리로 혹독한(?) 처가살이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달밭골 장인 곁에서 낮에는 서툴게 일하고 새벽에는 습관처럼 글 쓰며 살고 있다고 한다.

‘거기서 거기’에 불과한 사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음 속에 버무려낸 이 책이 내게 더 각별히 다가온 것은 입담 좋은 글힘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 개인적 이유 때문이다.

무대가 무창포라는 것은 책을 구입할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책장을 넘기며 발견한 ‘웅천’이라는 지명은 내게 나의 어느 한 시기를 떠올리게 했다. 글 속에 등장하는 ‘웅천역’ ‘웅천장’은 아릿하고 아련한 느낌으로 유년시절과 외할머니를 기억케 했다.

보령시로 묻어가거나 무창포의 위세에 눌려 웅천 출신이 아니면 ‘웅천’이라는 지명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초등학교 때부터 여름 겨울 가리지 않고 방학이 시작되기 무섭게 달려가곤 했던 웅천이다.

외가댁이 있었던 웅천은 내 유년시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엄마는 무슨 배짱으로 고작 초등학교 3학년인 나를 혼자 기차에 태워 외가에 보냈을까, 아마도 혼자서라도 외가에 가겠다고 억지를 부리며 몹시 졸랐을 게 분명하다. 외할머니 치마꼬리를 붙잡고 쫓아가곤 했던 장날의 풍경들.
웅천역, 웅천장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는 현재다.

외할머니가 외삼촌 따라 서울로 가신 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곳이지만 마지막 갔던 날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출장길에 눈길을 헤치고 들른, 예전의 북적거림은 간 곳 없이 썰렁하기 그지없던 외가댁과 나이 드신 외할머니. 많이 슬펐던 기억이 새롭다.

외할머니는 평생을 살아온 고향과 본가를 떠나 낯선 땅 서울에서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를 살아생전 마지막 뵙던 날도 눈이 아주 많이 내렸었다.

책장을 덮고 나니, 속 들여다보고, 알고 보면 너나할 것 없이 ‘거기서 거기’ 일 텐데, 죽기 살기로 아웅다웅하는 삶이 좀스러워 보인다. 사는 게 뭐 별건가?.

심판 는(생각 없는) 원판(아주, 워낙) 노상(항상) 암시롱두(아무렇지도) 숭년(흉년) 후질루구(어지럽히고).....외할머니의 다정한 목소리가 ‘웃긴’ 사투리가 아닌 ‘일상어’로 들린다. 어느덧 엄마가 외할머니 나이에 이르고 있다.

충청도의 ‘힘’이 뭐냐고? 사소한 일상을 사소하지 않게 순간순간 진지하게, 온 힘을 다해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가족과 고향이 어느 때보다 가까이,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추석 연휴가 끝났다.

가까운 시일 어머니를 모시고 유년의 기억이 묻혀 있는 그곳에 가 봐야할 것 같다. 너무 늦기 전에. 세상사 대부분이 개인의 일상을 무겁게 짓누르는 시대, 누군가에게는 전혀 사소할 수가 없는 ‘사소한 일상의 힘’을 믿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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