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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단어, 몸짓·마음짓·말짓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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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단어, 몸짓·마음짓·말짓의 산물
  • 석길암(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 승인 2013.09.27 14: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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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그리고 사람살림 | 1000 단어로 즐겁고 야무지게 살아가는 방법

누구나 1000개 내외 일상어 사용하긴 마찬가지
어떻게 사느냐는 어떤 단어 사용하느냐에 달려


지난번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도대체 몇 개쯤이나 되는 단어로 살아가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일상어를 사용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잠시 내비쳤었다. 어떤 분들은 일상어를 적게 사용하면 그 사람의 세계관이 좁은 것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세계관은 폭넓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생각의 지점은 일반론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지난번에 필자가 말한 일상어라는 것은 단순히 언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경험이기도 하고, 생각이기도 하고, 의지이기도 하고, 바램이기도 하며, 행동이기도 한 어떤 것이다. 불교 스타일로 신구의(身口意)의 세 가지 업(業)을 지으면서 살아가는 양상이고, 다시 현대어로 표현하면, 몸짓이고 마음짓이고 말짓이다. 우리 삶의 모든 양상은 이 세 가지 짓거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일상어라는 것은, 이 세 가지에 해당하는 짓거리가 집약되어 나타나는 것에 해당한다. 단순히 언어 혹은 알고 있고, 사용하고 있는 단어의 개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나는 몇 개의 단어를 사용하는가?’라는 물음 속에는, 우리는 평상시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내 일상생활에 대한 되짚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다시 물어보자.

‘나는 몇 개의 단어를 사용하는가?’
‘나는 평소에 어떻게 사는가?’
이 두 질문은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떻게’라는 단어에 당혹해한다. ‘많다/적다’ ‘크다/작다’에는 특히 익숙해있는데, 이건 ‘얼마나’에 해당하는 단어이다. 반면에 ‘그것이 어떻다’고 설명하고 또 대답하는 방식에는 익숙하지 않다.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어떻게’에 해당하는 단어 중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반응하는 단어가 없진 않은데, ‘빨리빨리’가 그런 경우이긴 하다. 하지만 다들 아는 것처럼, ‘빨리빨리’는 ‘대충대충’이기도 해서 ‘어떻게’를 충족시키기에는 대단히 곤란한 단어이기도 하다, 적어도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그런데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500 단어에서 1000 단어 내외를 사용하면서 일상을 살아간다. 이 단어의 숫자가 특정인에게 있어서는 대폭 늘어나고 또 다른 특정인에게 있어서는 대폭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의 일상에 있어서 사람들은 누구나 1000 개 내외의 단어만을 사용할 뿐이다. 똑똑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해서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단어의 개수가 2000 단어나 3000 단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이다. 결국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단어의 숫자만큼은 누구나 엇비슷하다는 소리이다.

그런데 1000 개 내외라는 엇비슷한 숫자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누구의 삶은 알차다고 즐거워 보인다고 말해지고, 누구의 삶은 궁핍해보이고 우울해 보인다고 말해진다. 왜 그럴까? 필자는 그 차이를 두 가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다는 것이다.

곤란한 지경에 처한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아버지는 왜 재벌이 아니지? 우리 엄마는 왜 날 이렇게 못 생기게 낳았지? 난 왜 태어나면서부터 머리가 나쁜 것일까? 등등.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건강한 몸뚱이가 남아 있잖아! 우는 것보단 웃는 게 보기에 더 좋잖아! 머리는 나쁘지만 끈기 하나는 끝내주잖아! 등등

곤란한 지경에 처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이 두 사람의 마음씀씀이는 천양지차로 다르다. 마음씀씀이만 다를까? 천만에. 곤경에 처한 일의 결과도 천양지차로 다를 수밖에 없다. 자기에 긍정적인 사람과 자기에게 부정적인 사람이 일을 대하고 처리하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결과 역시 그에 따라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곧 ‘자기’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그리고 ‘남’과 ‘너희’에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에 따라 사용하는 단어, 생각하는 마음짓은 완연하게 달라진다. 이것이 사용하는 단어에 따른 차이이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희망이나 의지에 가득 차 있을 때와 절망감에 몸부림칠 때 사용하는 언어 곧 마음짓과 말짓 그리고 몸짓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하나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 단어를 체감하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요즘 방송에서 유행하는 ‘한국의 맛’ 같은 맛집 순례 형태의 프로그램들을 생각해보자. 리포터들이 전국 각지의 독특한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그 집 특유의 음식들을 소개한다. 그런데 어떤 리포터가 어떤 언어로 표현해서 우리에게 그 맛의 감성을 전달해준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그 맛이 실감나게 와 닿지는 않는다. 곧 아무리 잘 구사된 언어라고 하더라도 그 맛의 실감을 전해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방송에서 본 맛집을 찾아나서는 이유는, 실은 리포터가 전해준 그 맛에 대한 묘사로부터 자극받아서라기보다는, 카메라가 보여준 음식의 모양새에 자극받아서라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리포터의 맛에 대한 소개말은 우리가 카메라 곧 영상을 통해 받은 자극에 일 푼을 더하는 것일 따름이고, 우리는 이미 영상으로부터 충분히 자극받은 상태였던 것이다.

맛집기행을 라디오로 청취했다고 생각해보자. 선뜻 그 맛집을 찾아 나설까? 텔레비전으로 보았을 때보다 백분의 일 혹은 천분의 일 정도나 그 맛집을 찾게 될까? 맛집 기행에 반응하는 정도가 다른 까닭은 시청했느냐, 아니면 청취했느냐의 차이 때문이다. 청각으로만 느끼는 것과 시각과 청각으로 동시에 느끼는 것에는 그 체감 정도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백문이불여일견인 셈이다. 그런데 실은 백견이불여일식(百見而不如一食) 곧 백번 보는 것이 한 번 먹어보는 것만 못하다. 곧 한 번 체험해보는 것이 백 번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체감의 정도가 강한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어도 마찬가지이다. 똑같은 단어라고 하더라도, 그 단어를 그 사람이 어떻게 체감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단어가 가지는 힘은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바야흐로 자기표현의 시대라고들 한다. 얼마나 자기를 잘 드러나게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패까지 달라진다고들 말한다. 유행을 따라 가느라 우리는 자기를 소개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궁리하고 구사하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그 말짓에 몸짓이 더해지고, 나아가서 마음짓까지 더해지면, 말짓 곧 말씨의 힘은 훨씬 더 강렬해진다.

똑같은 1000 단어로 어떻게 더 즐겁고 더 야무지게 살 수 있을까? 마음을 다하여 하는 말, 몸을 다하여 하는 말이라면, 똑같은 천 단어라고 하더라도 더 행복해지고 더 야무진 삶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똑 같은 천 단어에 어떻게 마음짓과 몸짓까지 더할 수 있을까? 나와 내 주변에 대해 찬찬히 살피고 곰곰이 되씹어 새기는 행위 외에 더 무엇이 필요할까? 마지막으로 다시 묻자.
"나의 1000 단어는 믿을 만한가?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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