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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술에 취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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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술에 취해야 했을까?
  • 박종훈(대전성모병원 원목실장)
  • 승인 2013.09.09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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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잔에 담긴 아버지의 인생

"아버지, 약주 한잔 받으세요."

2011년 9월 13일. 이날은 제가 아버지께 약주를 올린 뜻 깊은 날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약주 한잔 올리는 게 뭐 그리 대수냐 싶으시겠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예삿일이 아니었습니다.

2010년 2월 초. 종합검진을 받으시던 중, 예사롭지 않은 흔적이 폐에서 관찰되었고, 조직 검사 결과 악성 종양이라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곧 수술 스케줄이 잡혔고, 20여 일간에 걸친 입원생활 후에야 비로소 아버지는 퇴원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퇴원으로 모든 치료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달여간 집에서 가료를 마치신 후, 다시금 병원과 집을 오가시며 3개월간 총 4차에 걸친 항암 치료를 받으셔야 했고, 한 달여간에 걸쳐서 방사선 치료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계획된 모든 치료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8월 중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2011년 9월은 폐암 진단이 내려진 이후 수술과 병행되는 모든 치료를 마친 지 1년이 되는 시점입니다. 그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저는 아버지의 건강에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고, 아버지의 건강 회복을 기뻐하는 의미로 그날 아버지께 약주를 올렸습니다.

평소 흡연과 음주를 즐기셨던 아버지는 폐암 진단 이후 술과 담배 모두를 일절 끊으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아들이 따라주는 술이니까 오늘만큼은 기분 좋게 한 잔 받겠다"시며 받아든 잔을 30여 분에 걸쳐 조금 조금씩 드셨습니다.

기분 좋게, 그러나 조심스레 약주를 드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어릴 적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찌감치 집안일을 도맡으며 일곱 동생들을 이끌고, 우리들 네 남매를 키우셔야 했던 아버지는 농자금이며 학자금과 관련된 대출을 수시로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대출받은 자금은 그때그때 수확이 있을 때마다, 혹은 가을걷이가 끝나는 대로 상환하고는 하셨습니다.

농작물 수확으로 가계 수입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는 제일 먼저 대출받은 농자금이며 학자금을 상환하셨는데, 그럴 때면 아버지는 면 소재지에 있는 농협에 나가셨고, 농협의 실무자들을 만나 식사를 대접하고는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날은 어김없이 술에 많이 취하여 돌아오셨습니다.

술에 취해 돌아오신 아버지는 밤새 구토에 시달리셨고,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어머니는 "이기지도 못하면서 웬 술을 그렇게 많이 드시냐?"며 안타까워하시며 발을 동동 구르곤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아버지가, 술에 취하여 돌아오시는 아버지가 참 싫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술에 취하여 힘들어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이 싫었고, 힘겨워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밤새 애태워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왜 그렇게 취하셔야 했는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취하셨는지,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자식 셋을 낳아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는 말처럼,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한 여인을 만나 혼인을 하고 자녀를 낳아 가정을 이루었던 아버지의 나이에 이르러 보니 아버지의 고단했던 삶이 자연스레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어깨 위에 놓인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는지를, 일곱 동생과 네 자녀를 책임져야 했던 가난한 가장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를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고단했던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나니 아버지에게서 풍기던 소주 냄새도, 위장이 쏟아질 듯 위태롭게 들리던 구토 소리도, 밤새 힘겨워하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모두가 애처로운, 그러나 애틋한 기억이 되어 떠오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더 이상 그런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서글퍼집니다.

고단했던 삶의 무게를 소주 한잔에 담아내며 침묵해야만 했던 외로운 아버지, 그러나 건강하고 당당하고 책임감 강하셨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추억하며 이번 추석에는 아버지께 약주 두 잔을 올릴까 합니다. 약주 두 잔에 취하실 아버지는 아니지만 그 옛날 아버지에게서 느꼈었던 아련한 정취를 다시금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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