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문화자산이야기 | (1)항서바위와 연기대첩비
원나라 반군, 파탄 빠진 고려 칩입
세종시 정좌산 아래서 연합군 기습공격 감행
담력 지략 뛰어난 고려장수 한희유
원수산서 반군 괴멸, 항서바위 남아
행복도시 일대는 세상의 풍파를 벗어나 자연을 벗 삼아 지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를 들춰보면 800여 년 전 이곳은 나라의 운명이 걸린 치열한 전쟁터였다. 때는 고려시대, 40여 년간 몽골와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치욕적인 강화를 맺었고, 이후 두 차례의 일본정벌로 고려는 국토와 백성 모두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합단을 수괴로 한 원 반란군은 동북지역 요충지인 등주, 화주를 점거한 후 철령을 넘어 교주도(지금의 강원도)를 침입하고 양근성(지금의 경기도 양평군)을 공격했다. 철령은 한사람이 겨우 지나 갈 정도의 고갯길로 아무리 대군이라도 한사람씩 말에서 내려 걸어야 하는 전략요충지였으나 방어책임자가 적의 위세에 겁먹고 도망 가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 기회를 잃었을 뿐 아니라 굶주린 적에게 양곡마저 내 줘 남진의 빌미가 됐다. 원 반란군 수만 명은 가는 도시마다 사람을 죽여 양식을 삼는 등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원주와 충주에서 민관이 힘을 합쳐 기세등등하던 반란군을 격퇴하면서 전세가 반전됐고 때마침 원나라 원군도 참전했다. 고려조정도 중익군에 인후, 좌익군에 한희유, 우익군에 김흔을 임명하고는 공세에 나섰다. 인후는 충렬왕의 왕비 제국대장공주를 호위해 고려에 온 몽골인으로, 원나라의 위세를 믿고 왕을 업신여기는 등 오만방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반해 고려장수 한희유는 담력과 지략이 뛰어나며 전장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뜻밖의 반격에 연합군의 공격이 주춤하자 우익군 김흔이 장검을 치켜들고 앞에 나서서 물러서는 자는 목을 베겠다는 일성과 함께 적을 향해 돌진했다. 이에 군졸들도 용기백배해 죽음을 무릅쓰고 적을 베어나갔다. 결국 금강으로 도망하던 적은 30여리의 길에 시체를 남겼고 강에 빠져 죽은 적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적은 전열을 정비한 후 금강을 건너 다시 침략을 시도했지만 원수산 인근에서 한희유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에 괴멸되다시피 했다.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있던 부녀자, 의복, 말안장, 보물 등을 노획하는 성과도 거뒀다. 세종시 서면 쌍전리에 가면 낮은 구릉인 정좌산에 승적골, 군량골 등 대첩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으나 아쉽게도 당대의 전투를 입증할 만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원수산에는 고려장수 한희유가 적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는 항서바위가 남아 있어 그날의 승전을 전하고 있다. 보훈의 달 6월, 원수산을 바라보면 문필봉이라 불릴 만큼 뾰족한 봉우리가 멋진 풍광을 자아내지만 나라의 명운을 건 원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고려 군사들의 충정이 오늘날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는 부끄러움과 아쉬움에 긴 탄식과 함께 가슴 한 편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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