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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가 없었으면 한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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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가 없었으면 한글도 없었다?
  • 최민호(전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
  • 승인 2013.06.18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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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한글창제 몰입하다 실명직전 상태

청주 행궁서 초수로 치료했으나 효과 못 봐
전의 ‘신비의 약수’에 마지막 기대
최고 기수 선발해 6시간 내 한양수송
연기군 행정도시 포함 역사의 필연 아닌가!

세종시 전의·소정면에는 유난히도 우물 정(井)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우선 소정면은 면 자체가 정(井)이요, 전의에는 관정리 서정리 신정리가 있다. 유천리의 내천(川)도 생각해보면 물과 연관이 있으며, 금모래를 뜻하는 금사리도 물과 연관성이 깊다. 20여 년 전 필자가 충남도의 온천담당 직책에 있을 때 이곳에 온천개발을 위한 굴착작업을 시도한 적도 있다. 왕의 물 축제가 열리는 곳이 이곳이요, 생수공장이 많은 곳도 이곳이다.

전의의 조경수단지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것도 지하수와 인연이 깊다고도 할 수 있다. 고급 조경수는 급수와 배수조건이 좋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물의 마을 전의. 그런데 이곳은 우리 역사의 가장 중요한 일대 계기가 있었던 지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한글의 창제. 세종대왕의 한글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이 있었을까. 말은 한국말로 하면서, 글은 영어로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면, 자기 말을 영문으로 정확하게 표시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인 이 비극을 너무도 안타깝게 생각하여 세종대왕은 한글창제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작업은 극비 프로젝트였다. 중국과 사대주의 학자들의 반대로 인해 중국과의 외교문제를 비롯한 국내외적 갈등이 크게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1437년. 한글창제에 한창 몰입하던 이때, 세종대왕이 그만 악성 눈병에 걸리고 말았다. 백약이 무효였다. 고질적 눈병은 갈수록 악화되어 1441년경에는 거의 실명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앞이 안 보이는 왕이 지팡이를 짚고 효험 있다는 전국의 온천을 다니며 눈을 치료해 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급기야 세종대왕은 한글은 고사하고 왕으로서의 정사자체를 포기하고 첨사원(詹事院)을 두어 세자로 하여금 국정을 보게 하리라는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대신들이 울며 말렸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왕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한글 창제도 중단의 일대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온 나라가 시름에 젖어 있을 때, 전의에 사는 한 노인이 궁궐을 찾아왔다.

전의의 관정리라는 곳에 신비의 약수가 있는데, 눈병에 특효라는 것이었다. 이를 초수(椒水)라 하였는데, 전국적으로는 전의 청주 목천 세 곳에 난다고 하였다. 크게 기뻐하며 왕은 노인에게 목면 20필을 하사하고 우선 가까운 청주에 사람을 보내어 초수의 임상실험을 하였다. 과연 효과가 있다 하여 청주에 행궁을 짓고 직접 현지에서 초수로 눈병치료를 하였지만, 효험이 있는 듯 하다가 결국은 원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두 번째로 전의의 초수를 시험하였다. 과연 효험이 컸다. 서울의 궁궐에서 전의까지는 걸어서 10일, 말로 3일 걸리는 거리. 당연히 현지에 행궁을 짓고 몸소 납시어 치료를 해야 할 거리였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행궁건설을 불허하였다. 가뭄이 들어 백성이 힘들어 하는데 많은 비용을 들이며 백성을 괴롭힐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구슬이 서 말이면 무얼 하나. 꿸 수가 없었다.

더욱이 전의 약수는 물속의 가스가 시간이 흐르면 날라 가기 때문에 물을 떠서 6시간 내에 복용해야 약효가 있는 물이었다. 6시간 만에 전의에서 궁궐까지 물을 수송해야만 한다. ‘미션 임파서블’ 프로젝트가 계획되었다. 우선 전의에서 궁궐까지 몇 개의 역참을 두되, 역마다 두필의 말을 대기시켰다. 그리고 누구도 말의 주행을 방해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엄명을 내리고, 전국에서 말을 가장 잘 모는 사람을 압직(押直)이란 직함을 주어 역마다 배치하였다. 전의 초수를 살펴 좋은 물을 병에 담는 사람을 감고(勘考)라 하였고, 감고가 물을 병에 담으면 즉각 압직은 궁궐까지 내달린다.

서울까지 6시간.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최고수의 압직이 초고속의 속도로 6시간 만에 궁궐에 도달하는데 성공하였다.

매일 이러기를 수년. 전의 초수로 꾸준히 눈 치료를 받던 세종대왕은 드디어 1445년 4월13일, 영의정 황희 등 좌우 대신들에게 기뻐하며 자신의 눈병이 완치되었음을 알린다. 그리고 1446년 한글은 그 위대한 탄생이 세상에 선포된다. 음력9월의 일이었다.

그 전의 초수를 지금 우리는 ‘왕의 물’이라 부른다.

만일 세종대왕이 없고, 전의 초수가 없었다면 과연 한글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지금과 같은 IT강국, 나아가 경제·문화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세종시 전의면에 있는 ‘왕의 물’은 가정이 아닌 실제로 한글의 창제, 나아가 한국의 역사에 어마어마한 기여를 하였다.

행정중심복합도시가 세종대왕의 정신을 이어받은 세종시가 되고, 세종대왕의 눈병을 고쳤던 연기군의 전의면이 세종시가 된 것은 역사의 필연인가 우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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