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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현판 글씨는 누가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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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현판 글씨는 누가 썼을까
  •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 대표)
  • 승인 2013.07.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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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이야기 | 세종시와 인연 깊은 진주류씨

숭례문의 현판을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이런저런 역사서를 보면 숭례문 현판을 쓴 주인공이 다르게 기술돼 있기 때문이다.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되어 있으나 여러 이설이 존재한다. 추사 김정희의 ‘완당 전집’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신장의 글씨라고 적혀 있으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고 기록돼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잡지인 ‘별건곤’ 1929년 9월호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시대 명필 류진동의 글씨"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다른 유명 인사들과 달리 대중들에게 ‘류진동’이라는 이름은 낯설다. 류진동(柳辰仝, 시호는 정민)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497년(연산군 3년)에 출생해 1561년(명종 16년)에 사망했다. 자는 숙춘, 호는 죽당이며 류한평의 아들이다.

1522년(중종 17년)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31년 식년(式年, 3년마다 보던 정기과거)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했다. 중종 33년(1538) 정언(正言, 사간원의 정6품)을 지냈으며 이어 지평(持平, 사헌부의 5품 검사), 교리(校理, 문한의 일을 맡아보던 홍문관 등의 5품), 장령(掌令,정4품 검찰청 부장검사)을 두루 역임했다. 1543년(중종 38년) 부제학(副提學, 홍문관의 정3품)에 올랐다. 전라, 경기, 평안도의 외직을 맡고 명종 5년 성절사(聖節使, 중국황제 축하사신)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4년 뒤 대사헌(大司憲,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의 탄핵을 받아 파직 되었으나, 이때 경연(經筵,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던 일)에서 주역을 진강(進講, 임금 앞에 나아가 경서 등을 강론하는 것)하게 되었는데 그가 적임자라 하여 경연관(經筵官)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이어 공조판서(정2품 장관)에 이르렀고 1559년(명종 14년) 도총관(오위도총부 정2품)을 겸임하고 이어 중추부사(中樞府事,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종2품)가 되었으나 중풍으로 곧 돌아갔다.

문사에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기도 고양시 행신동 번데뫼 마을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는 류진동(柳辰仝) 묘역 봉분 주위에는 상석,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고 상석 뒷편에는 묘표가 세워져 있다. 대리석의 묘표에는 ‘자헌대부 공조판서 겸 지춘추관사 오위도총부총관 류진동묘’라 기록되어 있다. 이 비(碑)는 1562년(명종 17년)에 세운 것이다. 묘 아래 50m 지점에는 명종 18년(1563)에 건립된 신도비(神道碑, 2품 이상 관직을 지낸 인물의 묘소 앞에 세우는 비석)가 있다. 비문(碑文)은 홍섬이 짓고 송인이 썼다.

우암도 존경한 류흥룡의 학식

백참판공 류종식의 6대손 류흥룡(柳興龍, 1577~1656)은 문산(文山, 현 충북 청원군 문의)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문(詩文)에는 사회의 여러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과 내면적인 자기성찰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대부 의식 자체를 비판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유가적(儒家的) 지식인으로서의 입장을 지켰다. 학문적 성향은 도학을 기반으로 당시의 훈고학적인 연구 성과를 수용했다.

끊임없는 연구 생활을 통해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화재로 대부분 소실됐다. 당시 그의 덕행과 학문은 높이 인정받았다. 회덕(懷德, 현 대전 대덕구)에 살며 50년간 존왕양이(尊王攘夷,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함)를 교육의 근본으로 삼아 후진을 양성했다.

문인(門人)이 4~500명에 이르러 이른바 문산부자(文山夫子)로 숭앙됐다. 그가 운명하자 우암(尤庵, 송시열)이 묘비명을 짓고 동춘(同春, 동춘당 송준길)이 만사(輓詞, 죽은 이를 슬퍼하여 쓴 만장)를 지었다. 충북 청원군 가덕면 노동(蘆洞) 덕천서원(德川書院)에 배향되고, 하마비(下馬碑)도 서있다.

허준에 필적한 명의 류후성

참판공 류양식의 6대손 류후성(柳後聖)의 자는 일숙(一叔),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며 청매당 류명원(柳命元,1560~1628년)의 아들이다. 그는 18개 고을의 수령을 거쳐 현종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2품)에 이르렀는데, 의술이 뛰어나 효종과 현종 때 수어의(首御醫)로 공을 세워, 현종의 특명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1품 품계)까지 이르렀다.

선조 때의 명의 허준(許浚)과 비견할만한 명의(名醫)였다. 보국(輔國)은 정1품으로 의관에게는 과하다는 주청이 연이어 후에 취소되었다. 류후성은 조선 중기의 의관(醫官)으로 침(鍼)으로 유명했으며 1646년(인조 24)부터 3년간 왕실의 전의(典醫)를 역임했다.

그는 일곱 살에 어머니의 병으로 의약공부를 시작해 마침내 의리를 스스로 터득, 그 신기함을 세상에 알렸다. 그의 의술이 널리 알려져 사족(士族)으로 어의(御醫)가 되었다.

인조 때 천거를 통하여 내침의(內鍼醫)가 된 이후 현종 때까지 왕실에서 많은 치료의 효험을 보아 서울과 지방의 많은 관직을 지냈는데, 금화사(禁火司, 소방방재관아)의 별검(別檢, 7품 이하), 사평(司評, 정6품 관직), 금부도사(禁府都事, 종5품) 겸 내승(內乘)의 관직을 비롯해 금천, 과천, 포천, 전의, 용인, 교하, 진위, 양근, 김포, 부평, 인천, 파주, 여주 등의 수령을 지냈다.

그러나 효종임금 사망 때 입진(入診) 수의(首醫)로 유배되었다가 자전(慈殿)의 병증으로 인하여 서울과 가까운 직로에 연한을 정했다. 그 뒤 1660년 6월에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1662년에는 숭록대부(1품 품계)로 대왕대비의 병환을 보살펴 병을 낫게 해 품계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 품계)에 이르렀다.

류후성(柳後聖)이 조상의 묘소에 사초하기 위해 휴가를 청하자, 임금이 말을 내주라는 명을 내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묘(墓)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으며, 묘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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