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대표적 무인가문, 조선을 떠받치다
상태바
대표적 무인가문, 조선을 떠받치다
  •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 대표)
  • 승인 2013.06.2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권서 류혁연·류충걸 등 걸출한 인물 배출
▲ 대전시 서구 평촌동 산 18번지에 있는 류혁연의 묘


진주류씨 1세조(중시조) 류인비(柳仁庇)는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柳車達)의 10세손이다. 밀직사(密直使 : 왕명의 출납과 숙위와 군기에 관한 일을 맡아본 관청의 벼슬로 종2품)를 지낸 류순(柳淳)의 아들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고려에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 제찬과 사명을 맡아보던 관청의 종2품 문형), 지춘추관사(知春秋館司 : 고려 조선 때 시정의 기록을 맡아본 춘추관의 벼슬)등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 중서문하성의 종2품 재신)을 지내고 진산군(晋山君 : 진산은 진주의 별칭)에 봉해졌기에, 후손들은 본관을 문화(文化)에서 진주로 분적하게 되었다.
진주류씨는 류인비의 손자 대에서 익양공파(翊襄公派)와 안간공파(安簡公派)로 크게 나뉜다.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 정1품 정승) 2명, 문형(文衡 : 홍문관, 예문관의 정2품 대제학)1명, 공신 8명, 청백리 4명을 비롯해 많은 무장(武將)을 배출했는데, 익양공파에서 많이 나왔다.

삼도수군통제사 지낸 류혁연

▲ 류형(柳珩) 장군을 제향한 세종시 장군면 하봉리 충렬사


진주류씨의 대표적 충청권 인물은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무신 류혁연(柳赫然, 1616∼1680년)이다. 호는 야당(野堂),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으며 대대로 무신(武臣)의 집안에서 자랐다.
경원부사(府使, 정3품 수령)를 지낸 류용(柳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삼도수군통제사 류형(柳珩)이고, 아버지는 류효걸(柳孝傑)이다. 인조 22년(1644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삼도수군통제사, 공조판서(工曹判書, 조선시대 6조의 하나인 정2품 장관), 형조판서(정2품 법무장관)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어려운 일들을 잘 처리했다. 그러나 예송(禮訟)논쟁에 연루되어 관직이 삭탈되고, 숙종 16년(1680년)에 경상도 영해로 유배되는 시련을 맞기도 했다.

▲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된 류혁연의 글씨

무예에도 뛰어나 무신의 시험에서 줄곧 수석을 차지했으며 전략과 군사행정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화차의 사용을 권장하고 병서의 연구를 강력하게 내세웠으며 글씨와 죽화에도 뛰어났다.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방략으로 북방 지역의 길가에는 여러 나무들을 무성하게 심어 기병들의 내습을 막자고 했고, 화차(火車)의 사용 권장, 병서(兵書)의 연구를 강력하게 내세웠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신원(伸寃,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되어 영의정(정1품 정승)에 추증되었다.
대전광역시 서구 평촌동에 있는 묘소는 숙종 17년(1681년)에 이장한 것이며 1924년에는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가 세워졌다. 묘비의 비문은 이의국이 짓고 9대 손인 군수(종4품 수령) 류석우가 글씨를 쓴 것이다.

세종시 입향조, 류충걸

금사공(錦沙公) 류충걸(柳忠傑, 1588~1665년)은 충남 공주지역(세종시 편입지역) 진주류씨의 입향조로 알려져 있다. 자는 신백(藎伯), 호는 금사(錦沙)다. 관찰사(종2품 도지사) 류진동(柳辰仝)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통제사(統制使, 임진왜란 중에 설치된 종2품 무반직으로 3도 수군통제사를 말함) 류형(柳珩)이다.
그는 1618년 진사시에 합격했는데, 그 해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서인으로 강등시켜 서궁(西宮)에 유폐하자 이에 분개하여 대과를 단념하고 공주 장기에 은거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벼슬에 나갔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 조선 때 궁중의 어물(漁物), 육류, 식염, 소목(燒木), 거화(炬火)등에 관한 일을 담당한 종7품)으로 있으면서 의병을 모집해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나 화의가 성립돼 의병을 해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 왕세자를 보위하던 종5품)를 거쳐, 현감(종6품 수령)을 지냈다.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된 뒤에 설욕책을 상소하였는데 세자 사부로 있던 이유태(李惟泰)는 류충걸의 상소문을 읽고 높은 충의에 감탄했다. 여생의 대부분을 공주에서 은거했다. 송시열, 이유태, 박세채 등이 류충걸의 비문을 지을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후손들이 1827년에 금호서사(錦湖書社)를 세우고 정민공 류진동, 충경공 류형과 함께 제향해 왔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원래 진주류씨의 세거지는 경기도 고양 지역이었으나 공주에 세거하던 진주류씨 집안은 무인(武人)집안으로서 꾸준히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적 지위를 확보했다. 현 세종시 장군면 하봉리에는 류형(柳珩)을 제향한 충렬사가 있는데 진주류씨들이 공주 지역에서 사족(士族) 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하봉리에는 다른 성씨에 비해 진주류씨가 많은 편이다.

Tag
#NULL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