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딱 한 박자만큼 여유가 필요하다
상태바
딱 한 박자만큼 여유가 필요하다
  • 석길암(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 승인 2013.05.31 16: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처 "소소한 일상에서 거창한 행복 얻으라"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왕이면 잘 살아야지." 그렇다. 이왕 사는 것, 못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없다. 좀 더 즐겁고, 좀 더 많이 웃고, 좀 더 근심이 없고, 좀 더 슬픔이 없는 삶!
굳이 거창하게 행복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삶을 바란다. 대통령과 같은 권력을 거머쥐어야 행복하다, 대기업의 회장 정도만큼 돈을 벌어야 행복하다는 그런 사람은 드물다.
그저 지금 아픈 이 몸이 그만 아팠으면, 아니 통증이라도 좀 멈추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사람, 번듯한 내 집까지는 바라지 않으니 그저 월세라도 제 때 꼬박꼬박 걱정 없이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사람, 그저 내 자식이 서울 명문대학은 고사하고 지방 대학이라도 입학해서 걱정 없이 졸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사람, 아니 내 자식이 몸은 고되더라도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는 직장에라도 다녔으면 좋겠다는 사람 등등.
그저 그런 정도의 조그만 것만 바라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것이 세상이다. 거창한 것으로 행복을 삼는 사람은 실상 거의 없다는 이야기다. 그저 ‘조금만 더’ 정도에서 일상의 사소한 행복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세상이다.
그런데 그런 사소한 행복조차 우리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는다. 아니 그런 사소한 일상의 행복조차 얻어서 챙기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나 벅찬 것일까? 좀 더 챙겨주고, 좀 더 생각해주고, 좀 더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에게 그런 사소한 행복조차도 쉽게 주어지지 않은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싶다. 하나는 사회적 이유이고, 하나는 개인적 이유이다.
우선 사회적 이유,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나의 사소한 즐거움을 방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경쟁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사회는 개인과 개인의 이익, 개인과 사회의 이익, 집단과 집단의 이익이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갈등의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그 갈등 혹은 대립을 성공적으로 조화시켜 내는 사회는 안정적이고, 그렇지 못한 사회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안정적이든 불안정하든 간에 갈등의 조정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갈등의 조정결과가 최선이라고 하더라도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며, 또한 갈등 조정의 결과 최선에서 멀어질수록 개인들의 사소한 일상 혹은 사소한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의 기대치는 추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사소한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의 기대치를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갈등의 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회 내에서 그러한 갈등 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행위를 우리는 정치 참여라고 부르며,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우리네 사소한 일상의 기대치를 높이는 것은 자기기만의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정치 참여라는 사회적 원인이 되는 행위 역시 개인의 책임으로 귀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사소한 행복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개인적 이유, 우리는 많은 경우 사회적 책임을 이유로 개인이 사소한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들을 포기하도록 강요받고, 포기하도록 강요한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말을 바꾸어보자. 우리는 많은 경우, 다른 개인들의 사소한 일상을 희생시키며, 또 자신의 사소한 일상을 손쉽게 희생시킨다. 그리고 그 희생에 대하여 지나치게 간단한 핑계를 남발한다. "그게 더 중요하잖아." 그게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지에 대해서 고민해본 적은 있는 것일까? 우리는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외면해버린, 혹은 포기해버린 많은 것들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리고 그러한 무관심에 희생당한,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대개는 가족의 일상사이다-은 침울해진다. 그 침울함에 대해 우리는 배려해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또 하나의 간단한 핑계는 이렇다.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렇다. 많은 경우, 우리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한다. 미래를 위해서 지금은 참고 견딘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미래가 더 행복해졌을까? 글쎄다. 거창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 사소한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을 희생했을 때, 미래는 정말로 거창할 정도로 행복해질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필자는 거창한 행복, 거창한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지극히 사소한 일상에서 조금씩 얻어지는 안도감 그리고 슬며시 나오는 웃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얻을지도 모르는 거창한 행복을 위해서 지금 나의 소소한 즐거움을 희생시키는 바보 같은 짓거리는 사양하고 싶다. 제발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다. 소소한 즐거움, 소소한 만족, 그런 것들이 우리의 거창하고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내는 제일 중요한 장치니까 말이다.
이제 더더욱 개인인, 그리고 사소한 일상으로 들어가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삶의 기준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 거창하게 삶의 기준점이라고 할 것 없이 그냥 마주치는 일상마다 어떤 결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질문을 떠올릴 때 나는 말리고 싶다. "‘어떤’ ‘어떻게’라고 말하기 전에, 제발 ‘한숨’을 길게 쉬어주세요." 그리고 한 발걸음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뒤로 물러나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난 뒤에 생각해보자.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지?"
부처님은 ‘소소한 일상’에서 ‘거창한(?) 행복’을 얻는 방법을 여덟 가지의 바른 길[팔정도(八正道]로 설명한다.
올바르게 보라.[정견(正見)] 올바르게 생각하라.[정사(正思)] 올바르게 말하라.[정어(正語)] 올바르게 행동하라.[정업(正業)] 올바르게 목숨을 유지하라.[정명(正命)] 올바르게 부지런히 노력하라.[정정진(正精進)] 올바르게 기억하고 생각하라.[정념(正念)] 그리고 올바르게 마음을 안정시켜라.[정정(正定]
이것은 앞의 일곱 가지와 마지막의 한 가지로 크게 나누어서 말할 수 있는데, 마지막 한 가지가 앞의 일곱 가지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곧 올바르게 마음이 안정되어야만이 올바르게 보고,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말하고, 올바르게 행동하고, 올바르게 목숨을 유지하고, 올바르게 부지런히 노력하며, 올바르게 기억하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올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킬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마음을 안정시킬 수는 있다. 그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준비태세를 나는 이렇게 표현한다. "딱 한 박자만큼의 여유!"
소소한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얻는 것은 그 여유를 의도적으로 가지는 데서 시작된다. 많이도 아니다. 딱 한 박자만큼의 여유이다. ‘긴 한숨’과 ‘뒤로 물러나는 한 걸음’은 그래서 행복한 삶을 시작하는 첫 발이 된다.

Tag
#NULL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