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개같이 벌면 개 같은 습관만 쌓여
상태바
개같이 벌면 개 같은 습관만 쌓여
  • 석길암(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 승인 2013.05.20 15: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길, 그리고 사람살림 | 정말 쌀독에서 인심이 나는 것일까요?

우리 옛 속담에 이렇게 말한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 자신이 넉넉해야 다른 사람도 도울 수 있다는 속담이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또 말한다.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쓴다." 비천하게 벌더라도 쓸 때는 떳떳하게 그리고 보람 있게 쓴다는 속담이다. 악착 같이 돈을 버는 사람들, 돈에 포한이 생겨서 꼭 돈을 벌고야 말겠다는 사람들이 다른 일들은 제쳐두고 돈 버는 일을 최우선으로 할 때 흔히 뇌까리는 말이다. 혹은 그 돈 그렇게 벌어서 어디에 쓸 것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돈을 최우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는 흔한 답변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그런 그럴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쌀독이 넉넉한 사람이 쌀독이 빈 사람의 사정을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네 쌀독이 넉넉한 사람은 남의 쌀독도 넉넉하게 채워져 있는 줄로만 알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어야 나눌 수 있다. 맞는 말이다. 백번 맞는 말이다. 다만 그 조금의 여유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쌀독이 넉넉한 사람이 자기 쌀독이 비었을 때의 기억을 여전히 가지고 있을 때만 맞는 말이다.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여유가 없던 그 때의 기억을 여전히 가지고 있을 때나 맞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인심은 넉넉한 곳간 쌀독에서 난 것이 아니라, 내 곳간의 쌀독이 비었을 때 그 비참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 어쩔 수 없어서 막막했던 그 안타까운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쌀독이 빈 사람의 처지에 대한 기억, 누군가 손 한번만 내밀어 주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던 안타까운 기억, 내 곳간 쌀독에 쌀이 가득할 때 나처럼 쌀독이 비어있는 사람을 만나면 한번만이라도 손을 내밀어주겠다는 결심을 했던 기억! 그 기억에서 인심이 나오는 것이다. 그 기억에서 도와주어야겠다는, 한 손 내밀어 손등을 두드려 안타까운 심정을 조금이라도 위로해주겠다는 인심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소통이고, 그것이 공감이고, 그것이 나눔이다.
빈 곳간에서는 인심이 날 리가 없다? 빈 곳간 빈 쌀독을 가진 이에게는 하루하루가 버겁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빈 곳간 빈 쌀독을 가진 사람은 남의 집 곳간이며 쌀독이 빈 안타까운 사정을 보지 않아도 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을 더 쉽게 일으킨다. 적어도 그 기억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그 집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
그래서 소통이 중요하고, 공감이 중요하고, 나눔이 중요하다.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쓸 수 있을까? 천만에 만만에 말씀이다.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쓰는 사람은, 개 같이 벌 때에도 늘 정승이었던 사람뿐이다. 그것도 천의 하나, 만의 하나의 일뿐이다. 왜 개 같이 번다는 것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번다는 이야기이다. 정승 같이 쓴다는 것은 가치 있고 보람 있게만 쓴다는 이야기이다. 개 같이 버는 동안에 개 같은 습관이 차곡차곡 쌓인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습관이 온 몸에 온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서 어느새 성격이 되어버린다. 그 성격으로 정승같이 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도 그럴 수 없다.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쓴다’는 말은 천하게 생각하는 일, 귀하게 생각하는 일을 가리지 않고 정승처럼 가치 있게 일하고 보람 있게 일하는 사람에게나 적합한 말이지, 그야말로 물불 가리지 않고 버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도둑질하던 심보로, 도둑질한 돈을 어떻게 정승 같이 쓸 수 있을까. 천만의 만만의 말씀이다. 개 같이 벌어서는 정승 같이 쓸 수 없다. 정승 같이 벌 때만 정승 같이 쓸 수 있는 법이다. 버는 것도 가치 있고, 떳떳하고, 보람 있게 벌어야만 하는 것이다. 잘못 버는 것은 잘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잘못된 방법으로 버는 동안 쌓이고 쌓여서 성품이 되어버린 습관은, 옳게 움직여 보려고 해도 말을 들어먹지 않기 때문이다.
몸이 힘들다고 비천한 일이 아니다. 몸이 편하다고 고귀한 일이 아니다. 몸이 힘들어도 내 몸에 내 마음에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떳떳하다면 귀한 일이다. 몸이 편해도 내 몸에 내 마음에 거리낌이 있고 양심에 걸리는 일이라면 비천한 일일 뿐이다.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깝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받아들인다. 하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소통하는 지혜를 알려주는 가르침이란 것이다. 너나 나나 있는 그대로 온전히 아름다운 존재,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는 생각에서 서로를 바라볼 때, 그 때 사람 사이에 소통이, 공감이, 어우러짐이 시작된다고 부처님은 가르친다. ‘사(士)’자 돌림이란 ‘이름’ 때문에, ‘직업’ 때문에 더 아름다운 사람, 더 가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부처님은 가르친다. 이른바 연기(緣起)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또 하나는, 습관을 잘 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저 사람은 성격이 나빠서’라고 말하는데, 그 말은 ‘저 사람은 쌓아온 습관이 나빠서’라는 말과 같다.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 쓰는 것이 모두 습관이 결과라는 이야기이다. 부처님은 나쁜 습관을 계속해서 쌓아가는 존재를 괴로움과 번뇌의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衆生)’이라고 부르고, 좋은 습관을 계속해서 쌓아가는 존재를 괴로움과 번뇌의 바다에서 헤엄쳐 나오고 있는 ‘보살(菩薩)’이라고 불렀다.
결국 어떤 습관을 가지고 어떤 기억을 쌓아 가느냐가 그 사람의 삶이 아름답고 고귀할지, 아니면 흉악스럽고 비천할지를 결정한다는 가르침이다. 좋은 습관을 길들이는 사람은 부처가 되고, 나쁜 습관에 물드는 사람은 괴로운 중생의 삶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소리이다.
<숫타니파타>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설하신다.
"태어나면서부터 천한 사람이 되거나 태어나면서부터 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 천한 사람도 되고 귀한 사람도 되느니라."
부처님이 오신 날이 가깝다. 부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부처님이었던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실 때부터 부처님이셨던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온전히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귀한 줄을 알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서, 더 이상 괴로운 삶을 살지 않도록 가르침을 전할 때부터 부처님이셨다. 사람들이 온전히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귀한 줄을 알도록 당신의 행동으로, 당신의 마음씀씀이로 보여주실 때, 그 분은 부처님이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어제 내 곳간의 쌀독이 비었을 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 곳간이 비어버린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나눌 때, 우리도 부처다. 떳떳하게 벌어서 가치 있게 쓸 때, 우리도 부처다. 한 번의 생각, 한 찰나의 눈빛이 우리를 부처로도 만들고, 우리를 이기심에 악다구니치는 중생으로도 만든다.
우리는 부처가 될 것인가, 중생이 될 것인가.

Tag
#NULL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