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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영혼의 두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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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영혼의 두 여자
  • 송길룡
  • 승인 2016.05.26 1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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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수잔 서랜든과 지나 데이비스

>>고전, 여배우를 탐닉하다

두 여자는 일상에 찌든 갑갑증을 떨쳐내기 위해 주말여행이나 멀리 다녀오자고 한 게 전부였다. 델마(지나 데이비스)는 너무 어려서 결혼한 후 늘 독재자 같은 남편에게 구속당하며 살아왔다. 그 잠깐의 휴가 허락도 받아내지 못하고 큰 맘 먹고 무단 가출하기로 했다. 루이스(수잔 서랜든)는 사랑하는 애인이 생겼지만 아직 결혼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집구석에 처박혀사는 친구를 끌어내 기분전환이라도 할 요량을 냈다.
지긋지긋하게 조여드는 알량한 생활의 근거지를 벗어나자 두 여자는 해방의 쾌감을 느낀다. 특히 델마 쪽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이 자유의 시간을 만끽하려 한다. 술집에서 치근덕거리는 제비 같은 사내도 잠깐 놀기에는 괜찮을 듯 보인다. 아차! 그게 사단이 난 것이다. 이 음탕한 정욕의 카우보이는 껄떡대며 유혹하다가 잘 안되자 그만 델마를 겁탈하려 든다. 그냥 얌전히 돌아가기나 하지. 절호의 순간에 루이스로부터 제지당한 채 쫓겨나던 그 사내는 온갖 쌍욕을 내뱉으며 풀지 못한 마초기질을 게워낸다. 총구에 불이 붙는다. 탕!
이유야 어떻든 살인을 한 그 두 여자.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할 과거를 뒤로 한 채 델마와 루이스는 새로운 삶을 향해 드라이브를 시작하기로 한다. 루이스는 모아두었던 돈을 건네받아 델마와 함께 멕시코로 출발한다.
두 명의 총잡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여성판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던 이 영화 <델마와 루이스>는 좀 엉뚱해 보이지만 <에일리언2>과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SF대작을 연출한 리들리 스콧의 1991년 작품이다. 페미니즘 영화를 이야기할 때면 빠짐없이 거론되는 영화로서 여전히 보수적인 도덕율이 지배적인 미국에서 당시 큰 논란과 화제를 낳았다. 미국이 여성에 관대한 것 같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별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런 영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사고를 치고 무작정 신세계를 향하는 이 두 여자에게 눈앞의 전망은 과연 순탄했을까? 좀도둑에게 돈을 날리고 무일푼 신세가 된 이들은 강도짓도 서슴지 않게 된다. 그들을 붙잡으러 온 경찰관을 잡아묶어 트렁크에 가둬두는 대담한 행위도 펼친다.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조롱하던 정유차 운전사에게 도리어 매운맛을 보여준다. 험악해진 이 여자들이 그 정유차를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시원하게 펑! 터뜨려버리고 만다.
여자들이 할 짓이 아니라고 여기는 남자들의 가부장적 자세를 일거에 흔들어버린 그들. 델마와 루이스는 멕시코로 향하는 사막의 도로 위에서 자신들의 본모습을 다시 들여다보기에 이른다. 서로 이심전심의 눈길로 머리를 끄덕거린다. 그들에겐 죄책감보다 큰 깨달음이 번뜩인다. "그 어느 때보다도 깨어있는 듯해!"

>>최신영화개봉영화 촌평

레미제라블- 톰 후퍼, 2012, 영국
19세기 프랑스 격변기를 배경으로 처절한 운명의 주인공 장발장의 일대기를 속도감 있게 담은 뮤지컬영화. 역사성이 다소 흐려지는 것이 아쉽지만 사회적 빈곤상을 드러내준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만족스러움.


아무르- 미카엘 하네케, 2012, 프랑스/오스트리아/독일
넉넉하고 금슬좋고 남부럽지 않게 우아하게 살던 노부부의 가정이 갑작스레 찾아온 아내의 치매, 병수발에 지쳐가는 남편의 집착으로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붕괴돼간다. 사랑의 의미를 되묻는 칸영화제 수상작.

>>독립영화 프리즘

18대 대선이 끝난 직후 21일 한진중공업 노조 간부가 목숨을 끊은 데 이어 22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조 전 간부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온통 당선인에게로 초점이 맞춰진 대선 직후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생존과 처우개선의 측면에 이렇다 할 큰 진전이 없는 노동현장으로부터 타전된 안타까운 소식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잇단 죽음이 그 사건전말에 대한 폭넓은 주목을 이끌어내지도 못하는 실정에 처해있는 것도 사실이다. 도대체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들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가 매우 약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중요한 소식들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국민 대다수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한국의 전반적인 경제구조를 보면 한 해 1억명의 관객동원이 가능한 한국영화의 주된 테마 중 하나로 ‘노동’이 충분히 다뤄질 만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다지 ‘노동영화’에 호의적이지 않은 모습이다. 온통 노동자 천지인 나라에 살면서도 노동이 중심이 돼 나오는 영화를 볼 수 없는 상황인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를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노동영화는 돈이 되지 않는다. 영화제작이 사회적 가치가 아니라 경제적 가치에 의거해 이루어지는 작금의 상황에서 이해 못할 일이 아니다. 노동의 현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문제점들을 현실감있게 재구성해 공론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한국의 대중영화 제작-유통체계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돼 있다.
독립다큐멘터리 제작진들에 의해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 형태의 영화들이 생산되며 노동영화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도 배급망이 멀티플렉스영화관 체제에 종속된 상황에서는 좋은 노동다큐멘터리가 만들어져도 폭넓은 관람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사정이 이러한데 공장을 배경으로 하고 유명 인기스타가 노동자 주인공이 돼서 자본가들에 대항해 투쟁을 전개하는 박진감 넘치는 ‘노동액션영화’를 꿈이라도 꿔볼 수가 있겠는가.
시대를 거슬러올라가 보면, 장산곶매라는 영화제작집단이 1990년 노동절 101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파업전야>라는 영화가 바로 그런 노동액션영화에 속할 것이다. 당시 불법화돼 대학가를 중심으로 상영됐다. 관람하는 것 자체가 투쟁으로 여겨졌다. 이후 2006년에 KBS 독립영화관 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됐다.
국민 누구나의 문제일 수도 있는 노동자들의 죽음이 잇따라 나오는 절박한 현실인데 그것을 전격적으로 다루는 극영화는 아직 거론조차 안되고 있다. 한국의 영화는 언제까지 한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만들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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