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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 장터와 유관순 열사의 3·1정신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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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 장터와 유관순 열사의 3·1정신을 아십니까?”
  • 이계홍
  • 승인 2021.03.0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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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유관순 열사 옥사 자리에 동상 세우겠다”
류정우 유관순열사 기념 사업회 회장 인터뷰
유관순 수형기록부(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독립기념관

사단법인 유관순 열사 기념 사업회 류정우(柳汀宇) 회장은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서대문 감옥 현장에 유관순 열사의 동상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1919년 3.1운동 때 체포되어 이듬해인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서대문감옥 여자 8호 감방에서 야마사끼 왜놈 간수부장(교도관)에게 마구잡이로 발길질을 당하여 방광 파열로 순국한 만 18세 소녀의 항일 구국정신을 순국 현장에서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이 될 것입니다.”

필자는 얼마전 서울의 한 복판 중구 삼일대로 363번지 장교빌딩 15층에 자리 잡은 유관순 열사 기념 사업회 사무실을 찾아 류정우 회장으로부터 ‘유관순 열사와 3.1정신’에 관해 물었다. 

“어린 처녀가 고문 끝에 감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그런데 일제 당국이 시신을 돌려주지 않았지요. 온몸이 피멍이 든 채로 숨진 모습이 너무도 처참했기 때문에 그들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겠지요. 결국 교섭 끝에 2주 후인 10월 12일 유 열사가 다니던 이화학당(오늘의 이화여고)에 시신이 인계되었어요. 유 열사는 1년 반의 옥중 생활 끝에 죽음으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유 열사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류 회장이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장이 된 것은 유관순 열사와 같은 고흥 류씨 종친이었기 때문.

류 회장은 8년간 고흥류씨 중앙종친회장을 지내며 크고 작은 종친회 일을 보아왔으며, 이중 유관순 열사 관련 행사와 유업을 잇는 사업을 펼쳐왔다. 

“나는 유관순 열사와는 같은 석(錫)자 돌림의 형제간 항렬입니다. 우리에게 보통 명사화된 ‘유관순 누나’는 실제로 나의 서른여덟살 위 누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흥 류씨 27세손입니다.”

전임 회장 이혜훈 전 의원이 류 회장이 고흥 류씨 종친회장 자격으로 유관순 열사 행사는 물론 유업을 잇는 사업에 열정적으로 나서다 보니 어느 날 그에게 후임 회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고사했지만 한사코 맡기다시피 해 “‘만인의 누나’의 위업을 선양하는 자리를 맡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2017년 12월 1일 2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동안 유관순 열사 기념 사업회장직은 국방부 차관이자 원호처장(오늘의 보훈처·장관급), 토지개발공사 사장을 지낸 류근창씨, 곽정현 전 국회의원 등이 맡아왔다. 류근창·곽정현 전 회장은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충청향우회장 출신이라는 인연으로 회장직을 맡았다. 고흥 류씨 종친으로 유관순 기념 사업회장이 된 것은 류정우 회장이 첫 케이스다.

유관순이라는 ‘유씨’와 류 회장의 ‘류씨‘가 다르게 표기된 것은 버들 柳자를 70년대 이후 ’류씨‘로 사용해왔기 때문. 유관순 열사 기념 사업회는 성을 ‘류씨“로 사용하기 전의 명칭이어서 보훈처에 등록된 대로 사용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 기념 사업회 역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8.15.) 역사보다 길다.

이 사업회는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인 1947년 유관순 열사의 항일 구국 독립정신을 추앙하고 애국정신을 계승 선양함을 목적으로 발족되었다. 해방과 함께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상징으로 유관순 열사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유관순 열사 기념 사업회는 조병옥 박사가 명예 회장을 맡고, 서재필 이승만 김구 최현배 정인보 선생 등 민족 지도자들이 고문직을 맡았으며, 오천석 문교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각 시·도지사가 위원직을 맡은 범국민·범민족 기구로 출범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유관순 열사의 구국항쟁 정신으로 결합시킨 동력으로 삼기 위해 거족적으로 기념사업을 벌인 것이지요. 이때 유관순 열사 영화도 찍었습니다. 기념사업회는 이후 국가보훈처에 사단법인 단체로 등록되었습니다.“

유관순 열사 기념 사업회는 지금까지 각종 기념사업을 벌이고, 전국의 학교에 동상세우기, 기념 건축물 설치 등 사업을 펼쳐왔다.

그러나 국가상훈법에 김구, 이승만, 안창호, 안중근 등 30명이 포함된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과, 신채호, 신돌석 등 93명이 포상된 2등급 대통령장과 비교해, 유 열사는 823명 중 한 사람인 3등급 독립장을 추서받아 류정우 회장이 취임하면서 공적을 재신청해 마침내 1등급 대한민국장 서훈을 받아냈다.

이로써 1등급은 31명이 되었으며 국내 여성으로는 유관순 열사가 유일하다.

”유관순 열사가 아우내 만세운동은 물론 투옥 중에도 일본의 재판권을 거부하고, 독립투쟁을 벌이다 고문 끝에 사망함으로써 3.1독립운동의 꽃이 된 것은 어떤 무엇보다 숭고하고 순결한 애국정신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런데 서훈등급이 3등급이라는 것은 열사의 활동과 정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여론을 환기시킨 끝에 1등급으로 받아낸 것입니다. 청소년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1918년경 이화학당 보통과 졸업(추정) 사진. 사진 맨뒷줄 오른쪽 끝이 유관순 열사 ⓒ독립기념관

다음은 유관순 열사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중심으로 엮은 일문일답이다.


◎ 유관순 열사는 우리나라 초등학생들까지 추앙하는 인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 열사의 활동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관념적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부터 소개해주시지요.


“유관순 열사가 방광 파열로 순국했습니다. 어린 처녀가 얼마나 심한 고문을 당했길래 방광이 파열되었겠습니까. 유관순 열사가 죄수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퉁퉁 부은 얼굴인데, 고문을 당해서 그리된 것입니다.

고문으로 온 몸이 피멍이 들었으니 일제가 당장 시신을 내주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어찌어찌 교섭 끝에 순국한 지 14일만에 시신을 인계받았지요. 그때가 1920년 10월 12일입니다. 유 열사는 1년 반의 옥중 생활 끝에 죽음으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급니다.

이틀 후인 14일 유열사의 모교 이화학당 앞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집례로 장례 미사를 치렀습니다. 일제경찰의 엄혹한 감시하에 치러졌지요. 그리고 이름없는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 유열사의 시신은 강제로 이태원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런데 그로부터 15년 후인 1935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전환하면서 공동묘지의 모든 묘를 1936년 4월 30일까지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명합니다. 한성시(서울시) 보건과에서는 연고자들에게 묘 이장비를 지급했는데 5만기 중 2만2000기는 연고자가 나타나 이장비를 받고 묘를 이장했으나 나머지 2만8000기는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부러 널리 고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유관순 열사 묘도 무연고 묘가 되어서 한성부 위생과에서 무연고 묘의 유골을 수거한 것 중 하나로 화장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아무렇게나 파묻고, 1936년 12월 29일 무연고합장위령비라는 것만 하나 세워졌어요. 유열사의 유체는 수만의 유골들과 함께 이름없이 합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유 열사의 묘가 무연고 묘가 된 것은 누구 하나 돌볼 사람이 없는 비극적인 가족사 때문이기도 했다.

부모가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죽고, 오빠 역시 감옥에 갇혔었으며, 어린 형제들은 유리걸식을 하고, 친척들은 감시받고 살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을 유관순 열사 집안에서 상징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유관순 열사의 유골은 1936년 이태원 공동묘지 이전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후 유 열사의 고혼(孤魂)이라도 편히 쉬게 하고자 망우리 무연고합동묘에서 흙을 몇 삽 떠와 1989년 10월 천안시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招魂墓)를 봉안하게 되었습니다. 유열사는 이렇게 죽어서도 슬픈 사연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1933년 개설하여 1973년 폐장되기까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4.19혁명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품은 공간이다.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죽산 조봉암 등 독립운동가를 비롯해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 시인 박인환, 화가 이중섭, 소설가 계용묵 등이 그곳에 잠들어있다.

류 회장은 3.1여성동지회, 이화여고총동창회, 백석대 유관순연구소, 중량구청과 함께 합장묘역을 성역화하기 위한 사업을 펴오고 있다.

2018년 9월 7일 망우리 공원에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를 세웠으며, 2020년 10월 26일 서울시 중랑구청에서 유관순열사 합장묘역으로 새롭게 단장시켜 놓았다.


◎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의 주요 사업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앞으로 유관순 열사 동상을 북한에도 세울 계획입니다. 북한은 3.1독립선언을 한 손병희 선생이나 임시정부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을 인민에게 알리고 있지 않지만, 유관순 열사만은 우리와 똑같이 북한 고등중 교과서에 싣고 있습니다.

그들이 유관순 열사에 대해 널리 알리고 있는 것은 유관순 열사의 순결한 독립투쟁 정신을 높이 샀기 때문이겠지요.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남북미 정상회담이 진행됐을 때, 북한에 남북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 동상을 세울 계획을 세웠습니다.

통일부 교류협력국에 건의한 뒤 사업 추진 계획을 세웠으나 남북 관계가 교착상태가 되면서 구체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북 모두 공통적으로 이의없이 추앙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시행하려고 합니다.”

류정우 유관순 열사 기념 사업회 회장 ⓒ세종포스트

다음으로 필생의 사업으로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서대문 감옥 현장에 유관순 열사의 동상을 세우는 일이다.

서대문감옥 여자 8호 감방에서 순국한 만 18세 소녀의 항일 구국정신을 순국 현장에서 확인하는 것은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이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 감옥 수감 중에도 독립만세를 외치며 옥중 동료들에게 굴하지 말자고 격려했으며, 그때마다 끌려가 매질과 고문을 당했습니다. 인명을 살상하지 않은 시위에서 5년형을 선고받은 예도 없었지만, 옥중에서까지 굽힘없이 나라의 독립을 외치니 일제는 의도적으로 과도하게 소녀를 밟았습니다. 유열사의 굽힘없는 정신을 순국 현장에서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후세들에게 우선시되는 나라 사랑의 산교육이 될 것입니다.”

순국 100주년인 지난해 동상을 건립하려고 하였으나 여건이 따르지 않고, 코로나 19까지 겹쳐 이 역시 미룰 수밖에 없었다고 류 회장은 아쉬워한다.

“유관순 열사 소재의 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그는 사람들이 국가관과 민족관을 등한시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도 했다.  


◎ 한때 유관순 열사 영정을 5만원권 지폐에 넣기로 국민청원 운동을 하기도 했었지요?


“노무현 대통령 시절입니다만,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도 화폐에 쓰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종 단계에서 신사임당으로 바뀌었습니다. 한일간의 문제, 나이어린 소녀를 화폐 사진으로 쓰느냐는 가부장적인 보수적 태도들 때문에 밀린 것 같습니다. 신사임당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현모양처 모델이 국가 상징 화폐 사진으로 사용되는 것은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민족의 기개를 생각하면 이런 애국지사가 등재되어야지요. 순결하고 숭고한 여성 인물로는 유관순 열사 이상 누가 있습니까.”


◎ 그렇다면 유관순 정신은 무엇입니까.


“만 17세의 나이로 독립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유는 생명과 같다’고 한 말씀은 놀라운 사상 아닙니까. ‘나라의 완전한 독립만이 자유를 보장한다’는 말은 장자크 루소 이론과 같지요.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간판으로 유관순 열사의 이 어록을 올렸습니다만,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이라고 한 말씀은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 "유관순 열사의 운동 시기를 어떻게 나눌 수 있느냐"고 묻자 류 회장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유 열사는 이화학당 재학 중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 등과 함께 1919년 초‘이화학당 결사대'를 조직하여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만류하는 프라이 교장선생 등 교사들을 뿌리치고 학교 담을 넘어 탑골공원에 진출해 만세를 부르고 돌아왔다. 이후 계속 학생단 시위를 주도하고, 3월 5일 남대문 앞에서 벌어진 학생단 시위를 이끌었다. 

이날 5인결사대는 경무총감부 사찰계에 체포되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나서 석방을 요구하자 일단 풀려났으나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진 뒤였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을 함께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충청남도 병천으로 내려갔다. 

고향에서 유관순의 활동은 더 왕성했다. 일제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등 변복으로 병천 목천 천안 연기(오늘의 세종시) 안성 청주 등지의 교회학교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규합, 만세운동을 펼쳤다. 태극기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때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쳐 시위 군중에게 무차별 발포하면서 시위 주도자 유관순 학생을 체포했다. 유치장에 갇힌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유관순 열사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재 역시 만세운동 시위 중 일본 헌병의 총을 맞고 현장에서 죽음을 당했다.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던 오빠 유우석도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부모를 잃고 감옥에서 만난 두 남매는 비통했으나 오빠는 이렇게 말했다.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엄마도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너도 여기 왔구나. 하지만 관순아, 부모님의 죽음을 헛되이 말자.”

많은 사람들은 유관순 열사에게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의 가족사가 이렇게 비극적으로 부숴지는 과정을 잘 알지 못한다. 나머지 어린 형제들은 이후 유리걸식하며 비참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 몇 년 전 아베 정권 이후 일본의 극우화가 극심해지고, 국내에서도 친일파들이 발호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런 현상을 볼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 투옥 악독하기로 소문난 야마사끼 간수부장(교도관)에게 고문을 당했고, 복부를 밟혀 방광 파열로 사망했습니다. 그 소녀가 당했을 고문을 생각해보십시다. 유 열사와 그 가족이 개인적 영달을 위해 이런 험로를 갔겠습니까.

’침략자가 어떻게 주인을 재판하려 하나‘, ’내가 내 땅을 찾겠다는데 그게 무슨 죄가 되느냐’고 소녀가 준엄하게 일제를 꾸짖는 것을 보고 생각 있는 백성이라면 각성해야지요. 그래서 우리는 일본보다 못하면 안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의 국운이 융성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 자신의 위치를 비굴하게 자학하며 살았지만, 행정처리 능력은 세계 최고이며 한반도 땅에서는 게르마늄이 많아 한국산 배추 마늘 고추 양파가 세계 최고의 식품 재료가 되어 코로나 19도 거뜬히 이겨내고 있다”고 말한다.

”작은 울타리에 스스로 가두지 말고 대양과 대륙을 향해 웅비할 수 있는 기개를 펼쳐야 한다“고도 주문한다. 그래야 극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류 회장은 아산재단 재직 중 송파구 풍납동의 현대아산병원 건설을 총괄, 오늘의 전국 4대 메이저 병원의 기틀을 마련한 경영인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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