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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던 백기완 선생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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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던 백기완 선생 영면
  • 이계홍
  • 승인 2021.02.15 1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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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의 시선] 평생의 통일운동, 민주민중운동 발자취 남기고 지다
평생을 통일 운동에 바친 백기완 선생 ⓒ정의당 심상정 국회의원 페이스북

[세종포스트 이계홍 주필]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던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 15일 타계했다. 향년 89세다. 

그 숱한 풍상을 겪으며 89세를 살았다면 자연의 수로는 억울하지 않은 수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감옥과 고문과 평생의 투쟁과 병마로 인해 그의 한 평생은 굴절 많은 생이었다.

그러니 곡절많은 삶이었고, 그래서 육체의 곤고는 컸을 것이다.

우리는 한 시절의 운동가요이자 국민가요가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사가가 백기완 선생이란 사실을 잘 모른다.

소설가 황석영 씨가 80년대 광주에서 후배들과 5.18의 항쟁을 그린 뮤지칼을 만들면서 백기완 선생의 시집에서 ‘산 자여 따르라’란 구절을 노랫말로 만들었다는 일화를 아는 사람만이 아는 정도다.

현역 기자시절 필자는 통일문제연구소장 백기완 선생을 공사석에서 더러 만났다.

술자리에선 좌중을 흔들며 펼치는 그의 호기와 무용담은 과장은 있었지만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이 시대 그만한 순수와 열정과 낭만과 맑은 정신을 지닌 선구자가 없다고 보았기에 존경했다.

다소 경박스런 말씨와 쌍소리가 손해를 준 측면도 있었지만, 그런 것조차도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생 가시밭 외길을 걸어온 인물이란 점에서 존경의 마음은 컸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변절자를 보아왔던가. 일제 식민지 지식인들의 변절은 그렇다 치고, 그와 동년배나 후배들인 4.19 세대들이 4.19를 엎은 5.16 세력에게 기생해 4.19 정신을 훼손한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 이후에도 민주적 가치를 말살하는 독재정권에 부역해 일신의 영달을 취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필자야 용기도 없고 뜻도 분명치 않아서 겁을 먹은 상태로 방관자적 위치에 있었지만 변함없이 민주적 가치에 충실했다는 것만으로 자신을 격려하며 살아왔다.

그만큼 세상은 변절이 하나의 가치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변함없이 스스로를 지탱해온 것만으로 스스로 위무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어떤 누구로부터도 존경받아 마땅하다. 

“역사는 과연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하고 절규한 프랑스의 항독 레지스탕스 역사사회학자가 있다. 마르크 블로흐라는 사람이다. 그는 역사철학서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역사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블로흐는 역사교수로 재직하던 중 전쟁이 일어나자 2차 대전에 참전했다.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이후에는 레지스땅스 활동을 하다가 독일군에 붙잡혀 총살형으로 즉결처분되었다. 

솔직히 그의 ‘역사를 위한 변명’은 난해해서 다 읽지 못했다.

단편적으로 중요 대목만 읽었을 뿐이다. 집필 중 체포돼 처형됨으로써 완성되지 못한 관계로 설명을 더 달지 못해 난해했을지 모른다. 다만 체 게바라처럼 지식인의 드라마틱한 삶이 감동적이어서 그를 좋아했다.  

블로흐는 두 개의 의문에서부터 이 책을 서술해나간다. 그의 아들이 질문한 "아버지,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이지요?"라는 것과 "역사가 우리를 배신했다고 생각해야 할까?"라는 프랑스 군인의 질문이다. 

블로흐의 아들이 질문했던 것처럼 도대체 역사는 우리에게 효용성이 있는가. 역사는 힘센 놈 앞에서 무력하지 않는가. 역사는 그들에게는 거치장스러운 누더기와 같은 것이다. 역사는 약자의 변명이 될 수는 있어도 인류의 효용성에는 크게 미흡한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블로흐는 책 제목에서처럼 역사의 역할(효용성)을 말하지 않고 ‘역사를 위해 변명’했다. 참혹하게 죽어가면서도 역사의 허무와 패배주의를 딛고 역사의 헌신성과 유용성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 엄혹한 독재 시절, 많은 지식인들이 학자적 양심 대신 독재에 부역했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 가지 상황논리로 덮었다. 독재 정권이 한 지식인의 올곧은 정신마저 내버려 두지 않은 폭력성을 말할 수 있지만, 그래도 백기완 선생 같은 이 앞에서는 무의미한 변명으로 보인다. 

선생은 그 험난한 인생 역정 중에서도 불의에 굴복한 적이 없었다. 비폭력 무저항의 인생을 살았다. 문자 그대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정보부의 차가운 고문실도 그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다. 새파란 젊은 고문기술자가 뺨을 때려도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겼다.  

선생은 구변이 좋았다. 허풍도 있었고, 자화자찬의 으스댐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오히려 사랑스러웠다.

그런 것마저 없었다면 무슨 희망으로 세상을 버텨왔겠는가. 술이 한잔이라도 들어가면 얼굴이 불콰해지고, 쉽게 취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골병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본래 그는 고향 황해도 장사로 통했다고 자랑했다.

가수 정태춘 씨는 백기완 선생의 저서 출판기념회에서 "백기완 선생님은 우리 현대사에서 하나의 '사건'과 같은 존재입니다. 모든 시대가 '사건'을 통해서 깨닫고, 한 발 나아가듯이 백 선생님은 우리 시대에 울림을 준 큰 사람"이라고 했다.

필자 역시 적극 동의한다. 먼 발치에서 없는 듯 있는 듯 바라보면서 사소한 인연처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중학교 때 배운 ‘큰바위 얼굴’의 주인공이란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 

백기완 선생은 박정희 유신독재에 저항해 함석헌 장준하 션생과 함께 재야 연합전선을 하나로 묶은 중심에 섰다.

전두환의 폭압정치가 국민을 압살하던 80년대 이후에는 재야인사들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고 백범사상연구소-통일문제연구소를 만들어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1987년과 1992년에는 민중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민중의 독자적인 정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말을 발굴하고 보급하는 데 힘쓴 인물이기도 하다. 

줄곧 통일운동을 펼치는 한편으로 90년대 이후 노동운동에 앞장서고, 재야 전국연합을 창립했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범국민투쟁본부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평생의 통일운동이라는 미완의 과제를 남기고 떠났다. 민중민주투쟁 현장에서 백발 휘날리며 두 주먹 쥐고 노래를 외친 그의 영전에 그 자신의 시를 조사(弔辭)로 바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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