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전을 믿는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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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전을 믿는다(上) 
  • 이계홍 주필
  • 승인 2020.01.01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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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권두 칼럼]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비관주의 역사관 거부 
선거법‧공수처법 통과, 새로운 사회 기약… 중립과 균형, 충청인 역할론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어갈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세종포스트 이계홍 주필] ‘근하신년’이라는 인사는 요 며칠 사이 배가 부를 만큼 많이 받았을 것이다. 똑같은 인사를 거듭하는 것은 겉치레 같아서 이를 줄이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 우리는 ‘비관주의 역사관’ 속에서 살았다

오늘날 세계의 지성적 흐름은 비관주의 역사관에서 낙관주의 역사관으로 이행하고 있다. 이런 비관주의적 역사관은 미국이 주도해왔다. 석유 메이저와 군산 복합체, 월가와 주류 언론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앵글로색슨과 유대계들이다. 이들이 비관주의 역사관을 유포하며 장사를 하며 세계 관리를 해왔다.

우리도 그런 역사의 비관주의와 허무주의, 패배주의 속에서 살아왔다. 비관주의적 역사관에서 출발한 냉전시대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고, 지금도 상당 부분 그 속에 갇혀있다. 

그렇다면 왜 비관주의가 대세일까? 

낙관으로 희망을 주는 정치보다 비관으로 공포를 만들어 이익을 취하는 정치가 더 쉬웠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비관에 의한 공포 바이러스’에 세계인들이 알게 모르게 겁먹고, 그에 대비하느라 과도한 안전 비용, 국방 비용, 갈등 비용 등 사회적 비용을 지불했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길고도 지루하게 살았다.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ᐧ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북괴의 위협과 간첩단의 국가전복 위협. 그중 체제전복 세력이 북과 결합해 국가 기반을 흔들고, 사회를 무너뜨린다는 비관주의를 기반으로 한 겁박에 순치되어 살아왔다. 

이명박ᐧ박근혜 시절 민주주의를 모독하고, 천민자본주의의 오물 속에 빠져서 살아오기도 했다. 그것들은 지금도 큰 세력을 형성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 ‘체제 순응’이 안전하다고 믿었다

국민은 일제에 순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체제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으며 생각 없이 그 속에서 열심히 살았다.   

냉전의 틀 안에서 자식 잘 키우고 요행히 권력을 쥐고, 또는 부자가 된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기적의 부적’으로 여겼을 수 있다. 그들이 세상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지금은 구세력의 한 집단이 되어서 세상의 진화를 거부하고, 민주화를 야유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시대의 꼰대’ ‘사회의 틀딱’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변화를 외면하면 옛 기억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소멸하고 있다. 국민 지성이 그런 과거를 용납하지 않는다. 세계가 야만적 힘에 기반한 텍사스 서부 사나이의 마초 근성이 세상을 지배할 수 없다고 보듯이, 세계의 이성은 유럽의 낙관의 정치로 급속도로 이행해가고 있다. 독일 통일 이후 세계 지성사가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 ‘비관이 만드는 공포, 낙관이 만드는 희망’

이제는 낙관이 만드는 희망이 필요한 시대다. 

이에 대한 진단은 필자가 내린 것이 아니다. 베스트셀러 <진보의 역설> 저자이자 미국의 대표적 지성인 그레그 이스터브룩이 내린 평가다. 그는 저서 ‘비관이 만드는 공포, 낙관이 만드는 희망-낙관주의적 상상력 없이 인류의 진전은 없다’(김종수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번역, 움직이는 세계 간행)에서 이렇게 분석했고, 거기에 필자의 생각을 가미한 것이다. 

김종수 역자에 따르면, 그레그 이스터부룩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선진국은 ‘불안’과 ‘공포’라는 집단 심리로 장사를 해온 나라라고 진단한다. 그것은 미국적 ‘자이언트’ 기질에 젖은 ‘비관주의 지식인’들이 만든 ‘비관적 아젠다’를 미국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 정치인들이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비관에 의한 공포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스터부룩은 “인류의 진전을 위해서는 비관주의 역사관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세계 시장에서 추방된 낙관주의를 소환하는 이유는 “낙관주의는 역사의 화살(Arrow of History:역사의 방향성)을 추진시키는 활과 같다”고 믿기 때문이다. 

∂ ‘역사의 진전’을 방해하는 세력들

우리도 비관주의적 역사관에서 출발한 냉전의 시대를 끝내고 낙관주의적 상상력으로 한반도의 비전을 설계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고 본다. 그것을 새해의 다짐으로 가져도 좋다. 그런데 그것이 쉬운 일일까? 거부세력이 저렇게 강고하게 대오를 갖추고 있는데?

그러나 거부세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역설적으로 더 큰 힘의 탄력을 받게 되리라고 본다. 한반도에 새로운 바람이 부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보는 세력이 있다면, 그 반동력으로 그에 대한 거부세력도 강고해지게 되어있다.

구한말의 망국과 암울한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과 분단, 질식할 것 같은 독재체제, 그런 가운데서 70년 체제의 기득권의 벽을 견고하게 쌓아온 세력들이 있다. 

지난 과오를 딛고 바른 방향으로 가면 되겠지만, 자기 반성을 자기 패배 또는 자기 부정으로 인식하고 여전히 역사를 비틀고 민주화 도정을 조롱하며, 과거로 시계바늘을 돌리려는 세력들이다. 그렇게 역사의 진전을 방해하고 있지만, 6.10항쟁 이후 민주화의 도도한 물결은 더디긴 하지만 역사를 앞으로 조금씩 전진시키고 있다. 이것을 모르고 있다면 바보다.

기술은 발달해 점점 안전해지고, 독재자들은 승리하지 못하며, 불평등구조도 완전하진 못해도 해결과제를 가지고 있으며, 기후변화도 과학적 대안이 마련되고 있으며, 그런 도전이 있기 때문에 역사를 낙관한다.

이스터부룩은 낙관주의는 “걱정하지 말고 행복하자(Don’t worry, be happy)”는 주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낙관주의(Optimism)는 세상의 많은 잘못과 결함에 눈감자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방관하지 않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접근하면 난제는 풀릴 수 있다는 확신이자 다짐이다. 

∂ ‘선거법과 공수처법’ 통과

지난해 말 선거법과 공수처법 통과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2019년 말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법 통과를 통해 역사의 진전을 본다. 국민의 각성과 70%가 넘는 지지로 특권의 아성인 검찰 개혁을 단행하는 공수처법을 국회가 마침내 통과시켰다.

기존 검찰법과 지금까지의 검찰의 행태를 보면 질식할 것 같지 않은가. 기득권 중심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리를 나누고, 검찰권력, 보수언론, 보수야권 카르텔이 견고한 철벽을 치고 고수하려는 낡은 가치. 특권 반칙,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말이 나온 것이 40년 수년 전 일이지만, 여전히 이 레토릭은 법원과 검찰의 허공에 어둡게 깔려있다.  

검찰의 횡포와 군림과 반칙을 막기 위해 바꿔야 한다고 많은 국민들이 요구했다. 이런 가운데 국민이 두 개로 쪼개져 있다.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운다. 공수처법, 선거법이 통과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양 세력의 대립으로 국민적 파편화는 심해지고 있다. 되도 않는 논리로 선동된(?) 결과, 세뇌된 국민은 어느새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상대방의 의견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직 적대감으로 증오하고 저주하고 대립한다. 그러나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역사는 진전할 것이다. 

우리가 보다시피 낡은 정치제도로 인해 기존 정치는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탈법 반칙 특권 폭력 군림 속에 묻혀있다.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지역 붕당정치, 거대 정당 위주의 승자독식 선거제도, 당선되면 국민은 아랑곳없이 그들끼리 싸우는 이익 다툼…. 이런 구조에 신물이 나는 선거제를 바꾸자고 많은 국민이 들고 일어났다. 

물론 법을 바꾸면 누군가는 수혜를 보고 누군가는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어떤 제도건 간에 완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두렵다고 해서 답답하고 암울한 구조를 그대로 지고 갈 것인가. 더군다나 ‘촛불혁명’이 일어나 국민이 낡은 유제를 청산하라고 명령했다. 호불호를 떠나 국민적 합의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 중심 잡아주는 주체 ‘충청인’

이제는 어느 때보다 중립과 균형이 중요한 가치로 부각되고 있다. 

이런 때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이 시대와 사회를 내다보는 지성들이다. 그들이 발언해야 하고,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 

그 중심이 바로 충청인이라고 생각한다. 균형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어느 편에 선다는 오해를 살 것이 두려워서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 점잖은 성품과 기질 탓일 것이다. 어떤 사물을 판단하는 데는 경중은 있을지라도 어정쩡한 중립은 있을 수 없다. 또 가치 정립에 있어서 중립이란 애당초 성립되지 않는다. 

중립이란 틀린 것을 제 자리에 제대로 갖다 놓아주는 것이다. 선과 악의 중간이 아니다. 

균형은 더 말할 필요 없이 바른 것은 지켜주고, 틀린 것을 되돌려 놓는 개념이다. 허위와 진실의 중간이 균형이 아니라는 말이다. 과감히 진실 편에 서야 균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질 탓인지 충청도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잘 내지 않는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한 연설에서 “정말로 무서운 것은 사악한 자들의 사악한 외침이 아니라, 선한 자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라고 외쳤다. 허위가 진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어야 하는데 때를 묻힐까봐, 혹은 두려워서 침묵을 지킨다. 그래서 그의 길은 험난했다. 미국의 역사도 험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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