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김종서 문화제’, 범시민 축제로 승화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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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김종서 문화제’, 범시민 축제로 승화하자 
  • 이계홍
  • 승인 2019.10.17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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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의 시선] 신도시 절재로 활용 극대화, 축제 행진과 학술 세미나 등 문화 행사 검토해야
절재로가 김종서 장군의 호를 따서 만든 도로란 사실을 모르는 이들도 많다.
절재로가 김종서 장군의 호를 따서 만든 도로란 사실을 모르는 이들도 많다.

계백 장군(부여), 최영 장군(홍성/출생지가 개성 혹은 철원이라는 설도 있음), 김종서 장군(공주), 이순신 장군(아산), 김시민 장군(천안), 영규 의승장(공주), 김좌진 장군(홍성), 윤봉길 의사((예산)…. 모두 충남 출신의 구국 선각자들이다. 

이들 중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 많지만 높은 사상과 구국정신에 비해 묻힌 인물이 없지 않다. 김종서 장군(1383-1453)이 대표적이다. 그는 역할에 비해 의외로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분이 충청도 인물?”하고 묻는 이도 적지 않다. 

가족사가 멸문지화 당하고 상당 기간 역적으로 몰린 정치적 탄압 국면의 여파지만, 내용을 알고 보면 조선조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정신과 기개, 우국충정 모두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다. 

필자는 김종서 장군 이야기를 ‘역적(?)이 된 김종서 부활의 날개짓’(10월 1일자) ‘세종시 절재로와 김종서 숨겨진 사연’(9월 30일자) 칼럼을 세종포스트에 올린 바 있지만, 문무 겸비한 대문장가며, 지조와 덕망을 갖춘 대정치가며, 대륙의 기상을 드높이는 그의 정신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에 많은 안타까움을 갖고 있다. 

김종서는 정치적 지조를 지키는 한편으로 국토를 확장하고, 국경선을 획정한 인물이다. 세종 대에 두만강 육진을 쌓아 여진족(해동여진족 및 장백여진족)의 끊임없는 침략과 노략질에 맞서 수비벽을 쌓고 국경선을 확정했다. 여진족은 오늘의 헤이룽장성, 지린성을 무대로 한 기마 약탈민족으로서 조선 땅을 제 집 드나들 듯 하며 소나 말, 곡식은 물론 여자들까지 납치해 하루도 편안하게 지낼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때 김종서 관찰사가 세종대왕의 명을 받고 6진을 개척해 두만강 하류 지역에서부터 종성(鍾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의 여섯 진을 설치해 여진족의 침입을 막고,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확실하게 획정(劃定)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그곳이 우리 땅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정계비를 세우고 오도록 조치했는데도 호랑이가 두렵다거나 여진족에 겁을 먹고 아무 곳에나 말뚝을 박고 돌아와 버린 경우가 허다해 국경선의 경계가 사실상 모호했다. 그래서 오랑캐들이 아무렇게나 박힌 말뚝을 근거로 두만강 유역을 자기네들 땅이라고 우겨도 할 말이 없는 상횡이었다. 

고려 말의 경우에는, 홍건적과 나하추의 침입, 여진부족 우량하·오도리 부대의 발호로 동북 국경지대는 조선 땅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1393년(태조2) 함경도 동북지방 안무사 이지란으로 하여금 갑산·경흥 지역에 성을 쌓아 오랑캐를 진무하게 했으나 별무효과였다. 

그런데 김종서가 직접 부대를 이끌고 출몰하는 여진족을 소탕하고, 6진을 설치해 국경선을 설정하면서 제대로 된 국경 방어망을 구축했다. 김종서 장군이 국경선을 그어 한 치도 오랑캐 침입을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그의 기상을 살피는 시가 있다. 

장백산(백두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떻다 *인각화상(麟閣畫像)을 누구 먼저 하리오

*인각화상은 한나라 무제가 기린을 잡은 기념으로 누각을 세워 기린상을 그려 넣은 데서 유래한 말로, 그후 무제의 후예 선제가 공신 10명의 화상을 그려서 그들의 공적을 기리게 하여 인각화상이란 말이 생겨났다. 즉, 나라에 공훈을 세운 인물에게 기린상을 그려 후세에 길이 공적을 치하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 시는 시 자체 그대로 ‘백두산에 깃발을 꽂고 두망강에 말을 씻기니/ 썩은 선비들아, 우리는 사내 대장부가 아니냐/ 기린상에 과연 누구의 화상이 먼저 걸리겠는가를 보자’라는 호기와 기개가 서려있다. 당시에도 썩은 벼슬아치들이 공리공담(空理空談)에 빠져 나라 일은 돌보지 않고 큰소리치면서 탐욕과 타락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실망한 나머지 그는 북방 변경에서 현실을 탄식했던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변새가(邊塞歌: 변방 요새의 노래)’보다 필자는 ‘장백산 장부가’를 높이 산다. 현실적 고뇌와 고발정신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변새가’는 삭풍이 매섭게 부는 변방 성루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평원을 바라보는 장군의 기상이 문학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긴 칼을 짚고 서서 눈 덮인 드넓은 만주 땅을 향해 호령하는 자세는 그의 기상과 대호(大虎)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참여시 성격의 ‘장백산 장부가’는 현실 비판의 힘이 있다.  

세종과 김종서의 북방정책은 영토 확장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태종·세종대 대마도 정벌을 하도록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에 파견했다.

그래서 남쪽 왜구가 출몰하는 대마도에는 이종무, 북쪽 두만강 변엔 김종서가 버티고 있음으로 해서 우리의 국경선은 명확하게 확정되었는데, 불행히도 대마도는 그후 어리석은 공도정책(空島政策: 섬에 살고 있는 우리 주민이 해적을 피해 육지로 피하라는 정책) 때문에 대마도를 영영 왜인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하지만 김종서의 6진은 변함없이 나라를 굳건히 지키는 국경선의 바탕이 되었다. 

김종서의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고려사 편찬에서도 드러난다. 문종 원년(1434년)에 139권의 고려사를 집대성한 공적은 우리 역사적 큰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6진 개척과 함께 우리의 국경선을 획정한 주인공이란 업적은 다른 무엇보다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김종서가 개척한 육진에는 조선의 백성들이 편안하게 들어가 살게 되었으며, 남쪽 사람들도 두만강변 평야지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6진 개척은 그의 정신의 핵심 기둥이다. 대륙정신과 기개는 지금도 변함없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기치다. 이것을 잊으면 우리의 국경선을 잊는 것과 같다. 

제7회 김종서 장군 문화제 포스터.
제7회 김종서 장군 문화제 포스터.

최근 제7회 김종서 장군 문화제가 열렸다.

김종서 장군문화제 추진위원회(위원장 이충열)가 주관한 행사는 장군면민 퍼레이드, 공연, 세종시-공주시 상생협력 퍼포먼스, 주민자치프로그램 발표회, 초등학생 예술경연대회 등이 마련돼 주민과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문화체험, 즉 가훈쓰기, 장군휘호 쓰기, 타투 체험, 네일아트 체험과 먹거리 체험, 승마체험, 6진 개척, 떡메치기, 알밤굽기 등의 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져 축제 분위기를 달구었다.

제7회 세종축제와 맞물리고 신도시 메인 행사장과 거리가 있다보니, 다소 그늘 속에 묻힌 아쉬움은 남는다. 

이계홍 본지 주필.
이계홍 본지 주필.

앞으로 더 나아가 세종시 범시민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열리기를 바란다. 

 

김종서 장군의 아호를 딴 절재로가 약 7km 걸쳐 세종 신도시 중심을 가로지르고 있고, 이 길은 세종청사와 국책연구단지까지 아름다운 가로망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거리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학술 세미나도 가져 그의 사상을 널리 선양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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