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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강역! 부강 사람들의 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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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강역! 부강 사람들의 산 역사
  • 김수현
  • 승인 2012.08.02 04: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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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기자의 부강 이야기 (1)


유년 시절 철길은 꿈의 공간이었고, 미지의 세계였다.
끝간데없는 철길을 바라보며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철길은 내 자신 무한한 공간의 미미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설익은 성찰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부강 사람들에게 철길은 ‘생존의 길’이자 ‘꿈의 길’이고 ‘만남의 길’이었다. 그리고 ‘이별의 길’이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 부강역은 부강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며 지금까지 그 곳에 그렇게 버티고 있다.

부강역의 역사
경부선 철로가 부강 지역을 지나면서 1909년 부강역이 개통되었다. 당시 철로를 놓기 위해 부강리 남성골 마을에서 태산까지 연결되어 있던 산줄기를 깎았다. 마을 사람들은 기(氣)를 끊게 되는 것을 염려하였지만 막을 수 없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금강변 모래를 사용하기 위해 부강역에서부터 가까운 금강변으로 철도를 별도로 놓았는데, 이를 ‘모래철’이라 불렀다.


생존의 길
어머니는 신탄진, 조치원, 대전 장날이 서면 머리에 팔 것을 이고 부강역으로 나갔다. 부강역에는 가까운 장날에 장사 나가는 사람들로 가득 했다. 버스가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부강은 청주권보다는 대전권에 가까웠다. 매포역을 지나면 바로 신탄진역이고, 대전역이었다. 요즘 같은 뜨거운 여름이면 전국으로 팔려 나가는 ‘참외 집하장’이 부강역에 자리하기도 했다.

꿈의 길
배고프던 시절, 신분 상승의 유일한 통로는 ‘공부’와 ‘취업’이었다. ‘생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던 그 시절에는 향학열이 더욱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대전과 천안, 조치원으로 꿈을 찾아 통학하기도 했고, 기차를 타고 이사를 하기도 했다. 또한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청춘들은 취업을 위해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산업화 이후 서울은 곧 도시화와 문명을 상징했고, 이것은 한편으로 농촌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했다.


만남의 길
부강역은 부강사람들의 나들이 장소였고,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역을 개방하여 윗동네 사람들이 마을로 나오는 통로 역할도 했다. 특히 벚꽃이 유명한 부강역에 봄날 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면 젊은 청춘들의 가슴은 더욱 저리고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부강약수로 인해 대전에서 임시열차를 운행하면서 전국의 각향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기도 했다.

이별의 길
잠시 정차하고 있는 기차 창문을 응시하며 이별을 고하는 모습이 부지기수로 보였다. 공부를 위해, 취업을 위해, 군대를 위해, 베트남 파병을 위해, 중동 파견을 위해 이별의 이유는 달랐지만, ‘오늘이 마지막인 듯’ 처연하고 애처로웠다. 그리움은 깊었고, 기다림은 사무쳤다. 돌아온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베트남 참전 병사의 환영대회가 역에서 있기도 했다.

오늘의 부강역
지금도 부강역은 예전처럼 왕성하지는 못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의 이동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부강역에는 박한주 역장을 포함해 23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으며, 하루 평균 400명의 손님과 약 300개의 콘테이너가 운송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 부강사람들의 역사와 함께한 부강역, 세종시 출범과 함께 새롭게 편입된 부강사람들의 기대 못지 않게 세종시의 명소로 자리하길 고대한다. 이제는 한식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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