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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거 박찬호 성공 키워드, ‘한번만 더’9일 세종포스트빌딩서 공직자 대상 특강… 메이저리그 도전과 좌절, 환희 순간 담담히 전해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 박찬호가 9일 인사혁신처 공무원을 대상으로 인생 특강을 하고 있다.

[세종포스트 이희택 기자] 올해 메이저리그 사이영상을 넘보는 LA다저스 류현진. 그의 수상을 기대하는 국민들의 염원은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류현진이 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초 영예를 안는다고 할 때,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거를 개척한 ‘박찬호(46)’의 공을 빼놓고 얘기하긴 어렵다.

1994년 LA다저스 입단 이후 1998년 10승 투수 반열에 오른 시절, IMF에 시름하던 국민들은 ‘박찬호와 박세리 투혼’에 열광했다.

박찬호는 도전과 재기의 역사 그 자체로 통한다. 2010년 1월 부진의 늪에 빠져 새로운 팀을 찾아나섰을 때도 “1년만 더 메이저리그에서 던져보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당시 한화이글스의 하와이 전지훈련장에 합류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그가 9일 세종시 어진동 세종포스트빌딩 5층을 찾았다. 도전과 좌절, 환희, 재기의 인생사를 함께 공유하기 위해서다. 특강은 이날 오후 3시부터 1시간 가량 인사혁신처 공직자 대상으로 진행됐다.

박찬호는 자신의 성공 키워드를 '한번만 더'로 요약해 표현했다.

이날 확인한 그만의 인생 성공 키워드는 ‘한번만 더’다.

박찬호는 “감독님이 운동장을 10바퀴 뛰라고 하면 한바퀴 더 뛰었고, 푸쉬업을 50번하라고 하면 51번 했다”며 “다른 이들이 작심삼일을 숙제로 여겼다면, 작심사일이 박찬호의 이름이었다”며 인생 철학을 소개했다.

한국인 최초 10승 투수 타이틀도 ‘1승만 더’에 집중했기 때문이란다. 그는 “(순간순간 승리에 취하지 말고) 1승 선수만 되자. (투구는) 지금, 방금, 오늘 단 한번이라고 생각했다”며 “그렇게 쌓여서 10승이 됐다. 이 과정에서 겪은 한번의 실패가 제겐 끝이 아니었다”고 소회했다.

공직사회를 향해선 “공직사회는 뭔가 창의와 도전이란 단어와 먼 조직으로 인식됐고 자칫 안주하기 쉬운 환경인 게 사실”이라며 “작은 일을 모아 큰 일을 도모하는게 공직자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하루하루가 선택의 연속인데, 한가지씩만 도전해도 매일매일 성장하고 변화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인 ‘명상’을 추천했다.

그는 “저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 중 하나가 명상이다. 명상할 때 무한정 행복하다. 항상 하고 나면 원초적인 행복감과 편안함, 자신감을 얻는다”고 강조한 뒤, “(이 자리에) 명상하는 분 계신가요”라고 물어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전·후 부진의 늪에 빠졌을 때, 사이영상 3회 수상에 빛나는 클레이튼 커쇼와 일화도 소개했다.

박찬호는 “당시 메이저리그 홍보 차 중국을 방문했을 때, 한 팀과 ‘부진 시 마이너리그행’이란 조건부 계약을 한 적이 있다”며 “계약 후 하루 만에 마이너리그로 갔다. 그때 불러들인 선수가 유망주 커쇼(당시 20대 초반) 였다. 그 카드는 실패했고, 이틀 만에 다시 컴백했다”고 웃음 지었다.

인사혁신처 공직자들이 박찬호와 질의응답의 시간을 갖고 있다.

다음은 그가 공직자들과 나눈 일문일답.

-메이저리그에 계속 도전한 이유는 무엇인가.

“124승을 기록할 때 아시아 최다승에 도전하고 일본 투수를 넘고 싶었다. 포기하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도전하자니 자존심을 내려봐야 했다. 자존심은 착각이란 사실을 그때 알게 됐다. 한번쯤은 다 내려놔야 뭔가 클리어하게 보인다.”

-주변 사람들이 ‘성공의 비결’을 많이 물어보는 것으로 안다.

“젊은 시기에는 술과 담배, 여자를 멀리 해야 성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팀에서 국가대표,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진출도 그래서 가능했던 것 같다. 이후 사랑을 알게 되니 충격 그 자체였다. 좋아하는 여성이 생기니 야구가 더 잘 됐다.(웃음) ‘한번만 더’가 몸에 배이도록 했다. 시간이 흐르면 어느덧 경쟁하는 이들과 차별화된 나를 만났다.”

-박찬호의 현재 도전은 무엇인가.

“저한테 도전은 매일매일이다. 이런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도 굉장히 큰 과제고 도전이다. 이런 자리가 사실 굉장히 불편하다. 요즘은 다르지만 당시에는 오로지 야구만 했다. 자꾸 하니 강의 실력이 늘고 공감하는 분들이 많아 다행이다. 도전의 결실은 성장이다. 그 과정은 괴롭고 때로는 슬프다. 반대로 감사함과 깊이를 얻는다. 잘 했을 때 유혹을 맞이하고 안주하게 된다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

-국민들은 2단 옆차기 사건(?)을 여전히 기억한다. 당시 선수랑 화해는 했는가.

“공주에서 한양대를 왔을 때에도 ‘시골과 멍청도’ 소리를 들었으니, 미국가서도 차별과 왕따는 어찌보면 당연했다. 말도 못하고 마늘 냄새 나니 얼마나 싫겠는가. 그게 용납이 안됐고 선수들이 심하게 대하는 것을 못 참았다. 2단 옆차기는 영어가 안되니까 바디 랭귀지로 (표현)했다(웃음). 번트를 대고 태그 아웃을 시킬 때 굳이 저한테 와서 강하게 글러브를 가져다 댔다. 좀 아팠다. 이유를 물으니 더욱 심한 말을 했고 화가 났다. 다행히 (2단 옆차기는) 빗나갔다. 그 뒤로 협박에 가까운 소리를 받는 등 굉장히 무서웠다. 총맞고 쓰러지는 꿈도 여러번 꿨다. 이후 야구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사과를 하러 상대 선수에게 뛰어갔다. 그때 상대 선수는 또 다시 싸우러 달려드는 줄 알았을 것이다.(웃음) 솔직히 먼저 사과할 일은 아니었으나, 먼저 갔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을 사나이로 얘기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희택 기자  press26@sj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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