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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에 사무친 '배움', 학교설립 꿈꾸는 71세 할아버지[화제의 인물 인터뷰] 세종시 도담동 박노익 씨
 
[세종포스트 한지혜 기자] "죽어서도 배우고 싶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을 잇지 못하다 50대가 돼서야 다시 배움을 시작한 어르신이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무려 71세의 나이에 대학원 박사 과정까지 수료했다.
 
평생 배우지 못한 설움으로 고통스러웠다는 세종시민 박노익(71) 씨. 월남 파병과 태백 광산, 붕어빵 장사를 전전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그를 만나 물었다.
 
그 배움의 끝엔 도대체 무엇이 있느냐고.
 
금남면 도암리 출신, 머슴 아버지와 삼형제
 
그는 1947년 현재의 세종시 금남면 도암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머슴이었다. 10살에 고아가 돼 아내를 만나고, 삼형제를 건사하느라 부잣집 농사 품삯으로 근근히 사는 삶. 가족은 집도 없었고 땅도 없었다. 나무를 잔뜩 쌓아놓은 헛간이 다섯 식구가 누울 곳이었다.
 
“형들은 초등학교 문턱에도 못 가봤고, 다행이 막내인 나는 9살이 돼서야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1년 치 농사일에 대한 선(先) 품삯을 받아 살아갔기 때문에 중학교 입학시험을 1등으로 통과하고도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지요."
 
초등학교를 마친 뒤 그는 아버지를 따라 남의 집 논에 모를 심고, 벼를 베주는 일을 했다. 이후 충북 단양에 있는 시멘트 공장에서 2년 간 일했고, 강원도 태백 광산촌에서 광부가 됐다.  이후 울산 정유공장에서 기계 설비 일을 하고 있을 때 군대 영장이 날아왔다. 그는 경기도 파주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했다.
 
“태어나 군대 입대 전까지도 학력 때문에 괴로움과 설움이 많았어요. 내 삶의 탈출구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모 아니면 도’라고 어떻게든 월남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월남 파병과 탄피 10박스, 배움 빙자한 사기로 ‘좌절’
 
당시 한국은 베트남전쟁이 치열했던 1964년부터 휴전협정이 체결된 1973년까지 총 8년에 걸쳐 베트남에 국군을 파견했다. 그가 월남 파병을 가게 된 때는 1970년, 베트남 파병의 끝물이었다.
 
박 씨에 따르면, 1970년대 초반 월남 파병은 경쟁률이 높았다. 과거 베트남에 다녀온 군인들이 돈을 꽤 벌어왔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퍼졌기 때문.
 
“대대에 월남 차출 공지가 내려왔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고참에게 한참 얻어맞았던 그 날, 무슨 일을 저질러서라도 월남, 아니면 영창에라도 가야겠다고 다짐했어요. 휴가 복귀 후 선임이 가져다 준 막걸리를 마시고 내무반에서 사고를 쳤더니 다음날 파병 준비 소대로 보내졌지요.”
 
박 씨는 사이다 한 잔, 커피 한 잔 마시지 않고 월급을 아껴 한국에 보냈다. 1년 뒤 돌아올 때는 꾹꾹 눌러 담은 탄피 10박스를 가져왔는데, 대평리 논 10마지기 값이 됐다.
 
“집을 고치고 큰 형 수술비를 대고도 돈이 꽤 남았어요. 하지만 학교 행정실 서무일을 시켜주며 학교를 다니게 해주겠다던 교장과 브로커에게 논 닷마지기 값인 큰 돈을 떼이고, 냉차와 빙수, 붕어빵 장사를 하며 살았습니다. 나 같은 놈은 결국 배우지도 못하는구나 싶어 한때는 죽으려고도 했습니다.”
 
다행이 괴로웠던 시절 우연히 현재의 장모를 만났고, 9살 연하인 아내와 결혼했다. 금남면 대평리 버스 정류장에서 표를 팔아 번 돈으로 25만 원짜리 가건물로 된 집을 샀고, 방을 늘려 하숙집을 만들어 돈을 벌었다.
 
끈질기게 괴롭혔던 ‘짧은 가방끈’, 51세 학교 입학 
 
 
전국을 돌아다니며 안 해본 일이 없었던 그는 땅 보는 눈이 뛰어났다. 도면을 보면 상업지역과 계획관리 지역, 값이 오를 만한 땅이 한 눈에 보였다. 땅을 잘 본다는 소문은 금세 동네에 퍼졌다. 전매법도, 양도소득세법도 없던 때, 그가 낸 견적 그대로 땅 값이 됐다.
 
"197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을 언급하면서 새까만 차가 하루에도 10대씩 대평리를 오갔어요. 하나 있던 작은 복덕방 노인들 대신 직접 브리핑도 했었지요. 1985년 전매법과 양도소득세법, 공인중개사 제도가 생기기 전까지는 그런 식으로 큰 돈을 벌었답니다.”
 
1991년 그는 충남도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2010년까지 숱한 출마를 반복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버릴 수 없었던 배움의 꿈을 다시 펼친 건 첫 낙마 후 1997년, 그가 51세 되던 해였다.
 
“많은 돈을 벌고 능력을 키웠어도 결국 가방끈 짧은 놈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니더군요. 특히 자식들 가정환경조사서에 부모 학력 란을 쓸때마다 가장 괴로웠어요. 서울 강서구 신월동에 있는 야간 중학교에 입학을 결심한 건 내 나이 51세 되던 때였죠.”
 
당시 야간 고등학교에서 같이 공부했던 동급생들은 모두 10대. 복도를 지나가면 교장 선생님인 줄 아는 아이들이 머리 숙여 인사 하는 건 다반사였다. 부끄러움에 남몰래 가슴을 치던 그는 결국 졸업 후 62세에 강남대 법학과에 입학, 대전대로 편입해 학부 과정을 마쳤다.
 
이후 암 판정을 받은 그는 죽다 살아났다. 회복 후 2011년 배재대 교육대학원에 입학, 2014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박사 과정 공부를 마치고 마지막 논문 심사를 앞둔 상태다.
 
“남들이 보면 늦은 나이에 미쳤다고 볼 수 있지만, 공부에 한이 맺혀 배워도 배워도 또 배우고 싶습니다. 꾸준히 공부해 심리상담사 2급, 사회복지사 자격증, 아동심리상담사 2급, 미술지도사 자격증도 땄습니다.”
 
끝나지 않은 배움의 연장선, 학교 설립의 꿈
 
 
암 발병 전 그는 금남면 대평리에 전문 고등학교 설립을 추진했었다. 사재를 털어 1만 평의 땅을 매입해 학교를 지었는데, 일종의 자율학교였다. 그에 따르면, 대전 예지중·고 전 교장이자 이사장인 박경환 씨와 당시 설립을 함께 추진했다.
 
“과거에는 지역 유지들의 힘이 셌어요. 가방끈도 짧은 놈이 무슨 학교를 만드느냐며 공사 먼지와 소음, 자율학교를 깡패학교로 매도하는 등 인가 받는데도 몇 년이 걸렸지요. 고생 후 운영을 시작했는데 암에 걸려 십이지장과 췌장을 다 절제하고 죽다 살아났습니다. 학교는 그대로 빚이 됐고, 대학원에 입학한 것도 그 무렵입니다.”
 
박 씨는 대학원 석사 과정으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육학을 전공했다. 박사 학위를 딴 뒤에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스리랑카 등으로 한국어 교육 봉사를 나갈 계획이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전해 과거 베트남보다도 못했던 한국의 발전상을 교훈으로 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향후 남은 재산을 정리해 진짜 학교가 필요한 나라에 가서 학교 설립을 위해 힘쓰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배우고 공부한 목적이예요. 못 배워 억울하고 한이 맺혔던 기억을 뒤로 하고, 한국어 교육과 선교활동을 해볼 생각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 13년을 더 살고 있어요. 과거 아편전쟁 당시 선교사들은 중국에 학교를 세웠고, 한국 최초 근대식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도 미국 여성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겁니다. 나도 죽기 전에 꼭 그런 일을 하고 싶습니다.”
 
수 십 년 가슴에 사무쳤던 설움은 어느새 인생의 마지막 꿈으로 변했다. '죽어서도 배우고 싶다'고 말한 그가 세우게 될 학교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한지혜 기자  wisdom@sj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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