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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과 열정, 19세기초 낭만주의 예술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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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과 열정, 19세기초 낭만주의 예술의 정수
  • 정은영
  • 승인 2016.11.1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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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영의 미술사산책] <3>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에 우뚝 선 방랑자’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송구영신의 뜻을 다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다시 한 해가 저물어간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가속도를 더해간다고들 하더니 과연 그런가 보다. 하교 후 학교 운동장에서 놀던 어렸을 적엔 오후 한나절이 어찌 그리 길던지 해가 떨어질 때까지 한참을 놀았던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처음 새로운 것을 접할 때는 매순간이 새로운 경험으로 채워져 그 충만한 시간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산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미 익숙한 대상을 경험하거나 그러한 경험을 반복하는 시간은 별다른 자극 없이 흘러가 상대적으로 무의미하게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릴 적 오후 한나절이 그렇게 길었던 건 그만큼 체험하는 많은 것들이 새롭고 신기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고, 나이 들어 시간의 가속도를 절감하는 건 그만큼 새로운 경험은 사라지고 익숙한 일상을 별 감흥 없이 반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어든, 운동이든, 혹은 나쁜 습관을 바꾸는 작은 약속이든,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다짐했던 새해 결심이 서서히 흔들리고 어느새 익숙하고 편안한 과거의 일상으로 되돌아가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이즈음에 나태해진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는 그림이 하나 있다.


독일 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1818년 작품인 ‘안개 바다 위에 우뚝 선 방랑자(Der Wanderer ber dem Nebelmeer)’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숭고함에 대한 경외, 무한한 상상력과 뜨거운 열정이 가득했던 19세기 초 낭만주의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메마른 바위산 꼭대기에 올라선 젊은이가 넓고도 깊은 무한공간을 마주하고 있다. 곧게 편 오른쪽 다리에 몸무게를 싣고 한 발짝 더 높은 곳에 왼발을 내디딘 상태다. 그 높은 곳에서도 바람이 부는지 그의 머리칼이 부드럽게 물결치고 있다. 암갈색의 바위산과 암녹색 코트의 인물이 도드라져 보이도록 처리된 단색조의 배경은 은회색에 가까운 연보라 빛이다.


세로로 긴 캔버스에 안정정인 삼각형 구도를 취하고 있고 그 정점에 우뚝 선 청년의 좌우 양쪽으로 사뭇 드라마틱한 사선이 날개처럼 뻗어나가고 있지만, 거대한 자연을 대면한 주인공의 상황은 편안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일상적이지도 않다. 안개와 구름이 뒤섞인 끝없는 운해(雲海) 사이로 험준한 돌산과 거대한 산맥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어, 그의 눈앞엔 그야말로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뿐이다.


영웅처럼 서 있지만 꿈틀거리는 안개 저 밑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아찔한 낭떠러지일지도 모른다. 시간 또한 가늠하기 힘들다. 새벽녘인지 해질녘인지 알 수 없는 연푸른 회색 하늘 멀리에 금빛 햇살 몇 줄기만이 희미하게 수평으로 가로질러 빛나고 있을 뿐이다. 밝은 미래를 예고하는 찬란한 태양 같은 흔한 상징적 도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가장 수수께끼 같은 건 이 모든 미지의 대상을 맞닥뜨린 젊은이의 표정이다. 압도적인 세계를 앞에 두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 대자연의 거대한 섭리 앞에서 형용할 수 없는 숭고미(崇高美)에 감동하고 있는지, 혹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최고봉을 정복한 기쁨을 의기양양하게 만끽하고 있는지, 돌아선 뒷모습으로는 그의 마음을 읽을 길이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저 끝없이 펼쳐진 공간과 시간 속에서 분명 그에겐 타성에 젖은 나태함이나 뜻밖의 요행을 바라는 심리 따위는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의 시선은 저 멀고도 심오한 지점을 향해 있을 것이고, 그의 정신은 한갓된 존재를 초월한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되어 있을 것이며, 그의 마음은 광대한 자연의 기운을 품어 끊임없이 생동하는 원기로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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