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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교육과 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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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교육과 핑계
  • 민병찬
  • 승인 2016.06.2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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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민병찬 한밭대교수 | 지능형기계산업육성사업단장

무심코 자가용으로 지나던 길이었다. 산천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데 논과 밭이 있던 엑스포과학공원에서 현재는 과학의 요람 기초과학연구원(IBS) 설립을 위한 터파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신호를 기다리던 중 냇가 주변 자전거전용도로에 한가로이 자전거를 타고 자연에 즐거움을 만끽하는 커플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고향의 냇물이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가꾸어져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수업이 끝나면 냇물에서 물놀이로 더위를 식히곤 했다. 물놀이에 지쳐 배가 고플 즈음, 냇가의 밭으로 기어들어가 무 한 개씩 뽑아 먹으며 재잘거리다 주인아저씨한테 발각되어 된통 혼났다. 주인아저씨는 급기야 무 한 두 개를 더 뽑아 혼내심에 대한 보상을 주셨다. 며칠이 지나 우리는 같은 행동을 하고, 또 어른들로부터 꾸지람과 그에 대한 보상을 함께 받으며 순진하고 철없는 시절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윗사람에 대한 공경과 사랑을 익혔다.


지난해 정부에서는 인성교육법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인성교육법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보장’과 ‘건전하고 올바른 인성을 갖춘 국민을 육성하여 국가사회 발전에 이비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인성교육의 목표는 예(禮), 효(孝),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동 등의 마음가짐이나 사람됨과 관련되는 핵심적인 가치 또는 덕목이라고 한다. 국가가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인성을 갖춘 국민을 육성한다고 한다. 학교와 가정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인성교육을 국가가 대신해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한다는 얘기다.


과거에는 대학 교양과정에 윤리, 역사, 체육 등이 포함돼 있었다. 지금은 초등학교 5학년부터 교과에 영어는 있으나 별도의 도덕과목은 없어졌다. 국제화를 위한 외국어와 외국문화에 대한 열기는 불어넣으면서 정작 우리 정신문화에 대한 관심은 은연중 소외됐다. 인성과 인간사회에 대한 본연보다 지식과 성취를 위한 개인능력을 더 강조하는 현대교육의 단면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성교육은 훈련과 경험,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자기 깨달음으로부터 이루어진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무 한 개를 몰래 뽑아 배고픔을 달래던 때, 잘못을 호되게 꾸짖으면서도 상대의 심정을 이해하여 무 한 개를 슬그머니 더 뽑아주던 주인아저씨. 그러한 체험과 자기반성을 통해 교실에서 배울 수 없는 우리 내면의 인성 훈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인성교육은 일상생활에서, 어려서부터 친구와 어른들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혼나고 책망 듣고 또 칭찬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옛날 시골길은 두 사람이 함께 걷기에도 좁은 길들이 많았다. 누군가 반대편에서 마주 오면 한 사람은 길옆으로 비켜서서 기다려 주어야 했다. 그 상대가 노인이거나 어른이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누군가 양보하고 손해를 보는 행동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들이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동네 어른들께 거스르는 말 한마디는 물론 대꾸하는 것조차 혼날 일이었다. 그렇게 무조건(?) 어른에 대한 공경이 곧 효(孝)의 바탕으로 여겨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수저를 들기 전에는 식사를 할 수 없었던 시절이다.


올바른 인성은 효와 예로부터 이루어진다. 효를 알아야 ‘정직’한 마음으로 ‘존중’하고 자신을 ‘책임’질 수 있게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예를 갖출 수 있어야 ‘배려’와 ‘소통’으로 ‘협동’할 수 있게 된다. 민주주의는 서양의 수평적 사고와 행동만 강조해왔다. 때로는 우리의 수직적 사고와 행동이 존중과 효를 유지시키기도 한다. 


후세들이 인성을 갖춘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정, 학교, 사회에서 제대로 된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부모형제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 가정환경,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기쁨을 나누는 학교환경, 올바른 가치관을 수범하는 사회 환경 등이 어우러져야 그로부터 체득하면서 스스로 인성을 키울 수 있다. 결국 생각과 행동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경험하지 못한다면, 자신에 대한 책임과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린 독수리 새끼가 바위 언덕에서 떨어지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높은 하늘을 비상할 수 없다. 절벽의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어미가 먹이로 유혹하여 나는 법을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도 용기와 격려를 주면서, 때로는 엄한 훈육을 통해 후세들의 인성을 배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공자 왈 맹자 왈’이란 말을 구태의연한 생각이라 도외시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어릴 때, 선생님이나 부모님으로부터 회초리 한두 대 맞지 않고 자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인성교육,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으로부터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먼저 수범을 보여야 하는데, ‘자욕양이 친부대(子欲養而 親不待)’, 늘 핑계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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