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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열광한 '웃음의 기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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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열광한 '웃음의 기하학'
  • 이충건
  • 승인 2016.01.16 1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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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물탐구 | 화가 이순구


가장 많이 ‘무단도용’되는 ‘웃는 얼굴’의 화가
개념 미술-현대 민화 거쳐 만화 기법 결합
6월 서울서 개인전, 이해인 수녀와 책 출판도


벌써 10년 가까이 됐다. 그가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쓰라며 그림 두 장을 보내줬다. 노란 배경화면 속에서 한 소년이 목젖이 보일 정도로 활짝 웃고 있다. 또 다른 그림은 웃는 소녀의 얼굴이다. 나는 그 그림을 블로그 대문사진으로, 페북과 카톡의 프로필 사진으로 썼다. 내가 좋아하는 것처럼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도 그림을 좋아했다. 그의 그림은 서울 한복판 버스에서, 은행의 통장 표지에서, 새해 캘린더에서도 만날 수 있다. 지금 ‘웃는 얼굴’은 가장 많이 ‘무단도용’되는 그림이기도 하다. 작품에 대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작가의 권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만큼 그의 그림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이다.


문학소년, 그림을 만나다


‘웃는 얼굴’의 화가 이순구(56). 그는 1959년 7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까지 평범한 농촌에서 자랐다. 중학교 다닐 때 옆집에 책 대여점이 생겼다. 한 권에 10원씩, 그는 용돈만 생기면 책을 빌려 읽었다. 그러면서 소년은 문학을 꿈꿨다. 국문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그런 그의 운명을 바꾼 사람은 미술선생님이었다. 미술시간에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는 미대에 가라고 했다. 그는 싫다고 했다.


새 학년, 교실 문이 열렸다. 이런 젠장, 담임선생이 하필! 선생님은 그에게 또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그는 그 날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4월 23일. 그가 읍내 선생님 화실에서 처음 그림을 그린 날이다.


입학정보가 부족한 시골동네. 게다가 늦게 시작한 그림. 그는 선생님의 권유로 방학 중에는 서울에서 한 달씩 입시미술을 했다. 그때 만난 선생님이 공주 출신의 임동식이다. 그는 임 화백의 서울 화실에서 아침부터 막차가 끊기기 전까지 소묘를 했다.


그림을 늦게 시작한 탓인지 그는 두 번이나 대학에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집안형편도 어려워졌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논밭까지 팔아야 했다. 세 번째 낙방하고 지칠 대로 지친 그는 후기로 숭전대(지금의 한남대) 미술교육과에 갔다.


개념미술, 그리고 현대판 민화


그의 첫 개인전은 1990년 동아전시관에서 열렸다. 대학 졸업 후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그림에 몰두하던 때다. 동아전시관은 실험적인 작품을 하는 작가들이 자주 이용하던 곳이었다. 그는 베니어판을 긁어내고 다듬은 뒤 망치, 가위, 끌, 펀치 같은 도구의 형상을 새기거나 오려붙인 작품들을 내걸었다. 마티에르가 강한, 울룩불룩 거친 화면 일색이었다.


어느 날 공사장 근처를 지나다 시커멓게 그을린 베니어판이 눈에 들어온 게 계기였다. 주워 다가 페인트를 묻히고 크레파스와 물감으로 드로잉을 했더니 마음에 쏙 들었다. 합판 위에 무심코 올려놓은 가위며 펀치의 초록과 빨강 손잡이가 무척 잘어울렸다. 도구들을 합판 위에 새겼다.


그렇게 전체 화면이 구성됐다. 이제는 롤러로 먹물을 입힐 차례. 수분이 마른뒤 문지르면 오목한 부분에 먹물이 남는다. 목판화의 원판 느낌이 나는 작품이 완성됐다. 첫 전시회였다.


작품세계는 무늬로 옮겨갔다. 현대의 민화는 무엇일까? 그의 석사논문 주제가 한국 민화의 구도였다. 시장을 돌아다니다 할머니들 일 바지(몸뻬)에나 쓰이는 날염 천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찾던 현대 민화였다. 당장 천을 사다가 화면에 붙였다. 문양들이 무엇을 잘 나타낼까 생각하다 천을 캔버스에 붙여 소파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명암을 넣었다.


개념적인 설치미술, 극단적인 행위예술이 만연했고 미디어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각예술의 본질에 대한작가의 고민도 깊어졌다. 그려야 한다.


미술의 본질은 그리는 것이다. 대림미술관에서 열린 ‘그리기 그리기 전’이 열린 이유였다. ‘먼로 & 케네디’의 화가 김동유도 출품한 전시였다. 그는 천으로 붙이는 대신 소파의 무늬를 하나하나 그렸다. 문화(文化)는 글씨나 문양이 변한 것이다. 문양이 변화해가는 과정, 그것이 예술이었다. 2003년, 2004년까지 그는 그렇게 무늬에 천착했다.



아들이 그린 아빠 그림이 모티프


그는 만화에도 관심이 컸다. 만화의 장점은 간결한 표현이다. 간결하지만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나타낼 수 있어서다. 그는 1990년 국내 처음으로 공주대에 신설된 만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2008년까지 만화학과 강의도 했다. 그에겐 그림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기회였다.


2007년 화실의 짐정리를 하면서 아들이 유치원 다닐 때 아빠를 그린 그림을 발견했다. 아빠의 얼굴을 자기가 좋아하는 공룡으로 표현했다. 공룡은 온통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지만 무섭기보단 인자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동그랗게 그리고는 치아를 드러낸 채 환하게 웃는 얼굴을 낙서처럼 끄적거렸다. 그게 ‘웃는 얼굴’의 시작이었다.


대전 원도심인 대흥동 한 갤러리에서 웃는 얼굴을 모아 전시를 열었다. 반응은 엇갈렸다. 작가들은 싸구려 티 난다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전작들이 좋다며 아쉬워했다. 주제가 없어 입을 헤벌리고 있는 그림을 그리느냐는 소리도 들었다. 반면 대중들은 즉각적이고도 열광적이었다. 자신을 그림에 투영시키는 사람도 있었고,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닮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가톨릭계에서 달력을 만들자는 제의를 받고 부랴부랴 그림을 그리기까지 했다. ‘웃는 얼굴’은 단숨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한 블로거가 자신의 홈피에 ‘웃는 얼굴’ 몇 점과 함께 웃음의 의미를 적은 글을 올렸다. 조회 수가 순식간에 10만 건을 돌파했다. 블로거가 깜짝 놀라 글을 폐쇄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림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한참퍼 날라졌다. 블로그가 그의 그림을 알린 가장 강력한 매체였던 셈이다.


서울에서 시내버스 213대를 운행하는 동아운수는 그의 ‘웃는 얼굴들’로 버스미술관을 열기도 했다. 차량 한 대는 내부의 벽면에 작품을 붙이고 큐알(QR)코드를 삽입해 작가 약력과 작품을 스마트폰으로도 볼 수 있게 했다.


나머지 수백 대의 버스는 차체에 광고판 대신 그의 그림을 붙였다. 단언컨대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화가가 된 것이다.


웃음의 기하학,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위안


‘웃는 얼굴’은 우연히 찾은 아들의 그림이 모티프가 됐지만, 지금과는 전혀 딴판으로 보이는 초기 작품세계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원색의 어울림이 그렇고 무늬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이 그러하다. 동그란 얼굴, 커다랗게 벌어진 입과 가지런한 치아, 목젖이 드러난 하트모양의 혀, 초승달 모양의 눈. 이런 무늬들이 모여 극단적으로 보이기까지 한 웃음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무늬의 기하학이다.


극대화되고 과장돼 보이기까지 한 웃음과 달리 작가의 삶은 평탄치만은 않았다. 가정형편이 그랬고, 대학 진학도 쉽지 않았다. 미술계의 카르텔에 의해 국내 굴지의 미술상을 도둑맞기까지 했다. 어쩌면 ‘웃는 얼굴’은 스스로에 대한 위안이었는지 모른다. 낙담하고 좌절할 상황까지 웃어넘기려는. 작가의 내면을 짐작해보니 ‘웃음’의 깊이가 다르게 느껴진다.


농염하게 익은 홍시 같은 그의 최신 ‘웃는얼굴’들이 24일까지 대전시청 1층에서 전시중이다. 그는 2014년 3개월간 대작가의 얼이 서려 있는 프랑스 파리 근교 보쉬르센(Vauxsur-Seine)의 ‘고암 문화유적지’ 내 ‘이응노 레지던스’에서 창작 활동을 했다. 이 짧은 시기의 결과물들이다. 센 강변의 아름다운 자연을 두 팔 벌려 포옹하는 소년의 모습, 붉은 원색을 배경으로 그려진 세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웃는 얼굴’도 만날 수 있다.


그의 열아홉 번째 개인전은 6월 8~14일 서울 가나아트스페이스(인사동)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해인 수녀가 쓰고 그가 그린 책의 출판도 계획돼 있다.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과 ‘웃는 얼굴’, 입체화된 ‘웃는 얼굴’ 등 앞으로 있을 다양한 시도도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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