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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지역에 남긴 상처1-개미고개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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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지역에 남긴 상처1-개미고개전투
  • 홍석하
  • 승인 2012.06.2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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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면 개미고개전투, 미군 517명 희생

1981년 12월15일 동아일보 11면에 ‘미군유해 31년 만에 고향으로, 연기군 경찰관이 유해 이빨에 박힌 군번줄 발견’이란 기사가 실린다.

주인공은 미군 제24사단 21연대 제3대대소속 맥인니스 상사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미국 미시시피주 로빈튼시로 보내졌다. 한국전쟁사에는 전의전투로 알려진 개미고개전투 희생자가 세상에 처음 알려지는 순간이다.

1950년 7월9일부터 3일간의 전의전투에서 미군 517명이 희생된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2005년 5월20일 전투의 현장에 ‘자유 평화의 빛’이라는 전몰된 참전미군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개미고개에서는 아직도 유해발굴이 계속되고 있는데, 지난6월 13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30여구의 유해를 발굴하여 정밀조사에 들어갔다.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한국전쟁 최초의 전차전, 전의전투(국방부 한국전쟁사 인용)

천안의 방어에 실패한 미군 34연대의 뒤를 이어 24사단 예하 21연대가 전의와 조치원에 새로운 저지선을 구축했다. 전의는 천안 남방 20km 지점이었고, 조치원은 경부선과 충북선 철도가 분기하고 충북 방향으로 뻗은 국도가 있는 교통적 요충지여서, 이곳이 차단되면 이천-청주방면으로 후퇴하고 있었던 일부 국군 부대의 퇴로가 막히는 중요한 지역이다.

21연대는 전의 동쪽과 남쪽 고지에 2개 보병대대를 배치하고 조치원에는 연대 예비로서 1개 보병대대와 지원 배속부대로 들어와 있었던 1개 곡사포 1개포대와 78전차대대 A중대가 위치하고 있었다.

7월 9일, 이제 국도변의 불리한 싸움은 미군 21연대가 이어받게 됐다. 전날 천안을 수중에 넣은 인민군 4사단은 이날도 국도를 중심으로 남하하여 전의를 공격했는데, 미군의 저항이 점차로 거세지자 천안이남부터공격에 신중을 기했다.

이에 전의 동쪽의 구릉지에 진지를 점령한 미 혼성 1대대는 적의 얼굴도 보지 못한채 한낮을 넘기고 있었다. 이때에 혼성대대를 지휘중인 중대장은 주력으로써 134고지(전의역 동쪽 1.2km)에서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뻗어내려 국도에 이르는 일련의 능선에 진지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국도와 철도 건너에 있는 오얏고지(전의역 동남쪽 800m, 표고 100m정도)에 1개 소대를 배치했다.

이 두 진지로 그 사이로 동남향하는 국도와 철도를 함께 제압키로 한 것인데 오후3시 인민군의 전차 11대가 전의로 진입하는 것을 볼수 있었다.

이에 미군 항공기 30여대가 5시간에 걸쳐 공격, 전차 15대와 차량 30여대를 파괴했다.

7월 10일 날이 밝자, 전의 동쪽 진지에서 밤을 샌 연대장과 혼성대대원은 날이 밝는 즉시 인민군의 공세가들이닥칠 것으로 내다보았는데, 과연 그 예상이 적중했다.

이날은 새벽안개가 유난히 짙게 깔려 논바닥과 도로, 동서를 분간할 수 없는 상태였다.

오전 6시, 대대원들은 인민군이 눈앞까지 다가오는 소리는 들리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인민군은 일부 병력을 은밀히 접근시켜 산발사격을 하고 대응을 살피며 배치한 다음 7시부터 박격포사격을 퍼부었다.

미군은 4.2인치 중박격포로써 소대를 엄호해 인민군의 첫 번째 공격을 막아냈다. 그런데 이 때 인민군의 일부가 은밀히 도로 동쪽의 대대 주진지의 동측방으로 우회한 다음 박격포진지 쪽으로 잠입하고 이와 동시에 진지 정면에서 전차 1대가 안개 속으로 도로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그 후방으로 돌진했다.

능선 위의 미군 주진지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하다가 8시가 지나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다음에야 비로소 인민군이 등 뒤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때가 이미 늦어, 8시30분을 전후해 인민군의 보병 일부가 전차와 합류, 박격포 진지를 유린하고 말았다.

주진지와 박격포 진지 사이에 통신이 두절된 가운데 9시, 인민군의 공격이 재개됐다. 그들은 전의마을로부터 동쪽의 대대 주진지 정면으로 기어올랐다.

이에 포병의 화력으로 이들을 막아내어, 어느덧 11시를 넘기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그 좌측 소대정면으로그들의 음성이 들린다고 연대장에게 보고됐다.

그러나 4.2인치박격포 지원이 끊어져 소대를 엄호할 수 없었다. 결국 미군 3대대진지로 철수한 연대장은 대대장에게 "즉시 역습을 감행하여 혼성1대대의 진지를 탈환하라."라고 명령한 다음 철수 병력과 함께 조치원의 연대CP로 복귀하여 혼성대대 중대로 하여금 시급히 전열을 가다듬도록 조치한다.

7월 11일로 사단은 금강이북에서의 저항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날 새벽에 미곡리 부근의 진지를 다시점령한 미군 3대대는 날이 미처 밝기 전에 인민군의공세를 맞게 된다.

짙은 안개 중에 도전하는 총성을 울린 그들의 예기가 자못 날카로웠는데, 이는 한강선을 돌파한 뒤로 줄곧 인민군 4사단을 뒤따르다가 전투에 처음 참여한 3사단이었다.

3사단은 전례 없이 보병과 전차, 포병의 협동을 이루는 가운데 대대 진지에 대한 정면 돌파와 측면 포위의 수법으로써 미군대대를 단번에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전날 저녁에 일시 K중대의 진지를 점령하였을 때에 그 동쪽에 있는 대대 주진지의 배치 상황을 정찰하여 대대의 병력 배비 상태와 지휘소의 위치 등을 사전에 간파한 듯, 먼저 야포와 중박격포로써 진지 동남쪽의 도로변에 위치한 지휘소 부근에 집중 포격을 가하여 통신취급소와 탄약 저장소를 폭파했다.

그리하여 통신소의 기능이 마비되고 탄약이 연쇄 폭발하면서 미군 대대본부병력의 태반이 살상됐다.

한편 전날 밤, 사단장으로부터 조치원 북쪽 3km 선까지의 철수를 내락 받은 연대장은 1대대가 대전에서 조치원에 도착하는 대로 투입하여 새로운 저지진지를 마련토록 하는 가운데, 전선의 3대대로 하여금 접적을 유지하면서 철수케 함으로써 동선에서 이들을 수용하여 최대한으로 버티어 내기로 했는데, 새벽에 스미스 중령이 B, C 양 중대를 이끌고 조치원에 당도하여 그 곳의 A, D 중대를 통합 지휘토록 했다.

한편 사단장은 대구와 포항의 제 19연대 및 제 13포병대대를 대전에 집결토록하고, 이들이 이동하는 동안 제1선의 전황을 지켜보았는데, 저녁이 되자 전의 남쪽 제 21연대 3대대의 참담한 패전 보고에 접하게 되었다.

결국 12일까지 교전에서 1대대가 전멸에 가까운 괴멸적인 타격을 입어 사단장의 명에 의해 조치원을 포기하고 금강까지 철수하게 된다.

전의전투에서 미군 21연대가 1개 대대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철수하지만, 천안에서 도로를 통해 전의로 투입되고 있었던 인민군 전차 38대를 비롯한 수백 여 대의 차량과 다수의 병력이 미 공군의 항공지원으로 파괴하여 21연대는 더 이상의 피해를 입지 않고 금강방어선까지 철수할 수 있었다.

인민군은 미 공군의 항공지원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입음에 따라 주간기동을 최대한 지양하고 야간에만 부대가 이동하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미 24사단은 금강방어선에서 물러나며 전차의 진격저지를 위해 다리를 폭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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