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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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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민주주의
  • 김재중 기자
  • 승인 2013.11.11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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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중 기자의 뉴스리뷰 불혹에 접어든 ‘X세대’를 위하여

소품 활용해 향수 자극한 게 성공비결
시대정신 반영 없어 리얼리티 감동은 부족

케이블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장안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포털사이트 검색어 상위에 오를 정도니 그 인기를 실감할 만하다.

사실 필자가 드라마를 주제로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필자의 삶에서 드라마란 ‘투덜거림의 대상’일 뿐. ‘뻔하고 비현실적인’ 스토리에 푹 빠진 아내를 보며,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푸념을 늘어놓다 도끼눈에 놀라 자리를 슬그머니 피하는 일이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런 필자에게 지난 주말 리모컨 무제한 사용권이 주어졌다. 뉴스채널, 다큐멘터리 채널을 돌리다 스포츠채널까지 죄 훑어봤지만 뭐 하나 시선을 끄는 프로그램이 없었다. 그러다 낮 익은 음악에 사로잡혀 채널을 고정시킨 드라마가 ‘응답하라 1994’였다.

등장인물의 관계, 극적 흐름, 사건의 개연성…. 이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무 살 안팎, 1994년을 경험해 본 시청자를 ‘쫙’ 빨아들일 만한 드라마의 배경과 소품들이 묘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삐삐, 벽돌만한 무선전화기, 화장품, 의상과 신발 등 소품에서부터 락카페, 레몬소주, 오렌지족, 015B의 음악, 헤어스타일 등 문화적 트렌드까지….

젊음을 가두려는 정치와 자본의 꼼수

막 불혹에 접어든 필자와 또래들을 하나로 묶는 코드는 사실 정치보다 문화에 가깝다. 바로 위 선배 세대를 묶는 용어인 ‘386’이 다분히 정치적인 의미로 통했다면 이후 세대인 ‘X세대’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라 자기중심적 가치관이 강한 1990년대 중반 당시의 신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X세대’는 선배 세대인 ‘386’으로부터 후배세대를 분리시키기 위한 ‘정치와 자본의 꼼수’라는 것이 필자의 시각이다. ‘너희는 선배들처럼 더 이상 머리띠 두르고 거리로 몰려나가지 마라’는 무언의 압박이 바로 ‘X세대’라는 세대규정에 녹아있었다고 본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사회변혁운동의 정점에 섰던 학생운동은 1992년 대선투쟁까지 이어진다.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하며 방향타를 잃을 것으로 보였던 학생운동이 대통령선거에서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김영삼 후보 반대운동으로 번지자 정권의 학원탄압이 절정에 이르기도 했다.

바로 그때 등장한 것이 캐나다 작가의 작품이름에서 따왔다는 ‘X세대’라는 정체불명의 세대 규정이다. 틈새를 파고 든 자본의 공세도 만만치 않았다.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1990년대 초 밤12시로 제한됐던 유흥업소 영업시간이 풀렸다. 트렌드에 민감한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민감한 소비계층이 될 것은 빤한 일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아이돌 스타’쯤 되는 인기연예인이 ‘오렌지족’이 돼 ‘X세대’ 문화를 이끄는 첨병인 것처럼 폼을 잡는 드라마와 영화가 줄을 이었다.

정말 ‘X세대’는 사회에 관심이 없고 이기적이며 소비만 추구하는 사회적 무뇌아들이었을까? 결코 아니다. ‘X세대’라는 세대규정은 1990년대 중반 젊은이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기보다는 권력과 자본이 당대의 젊은이들을 가두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386 공동체문화 물려받은 세대

다시 드라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응답하라 1994’에 등장하는 하숙생 중에 한 명 쯤, 대학가 선술집에 앉아 민중가요를 부르고 술에 취해 ‘개똥철학’을 주절거리는 모습이 나온다면 어떨까. 젊음의 한 가운데 어찌 사랑과 낭만만 존재했겠나. 시대의 아픔을 고민하고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젊음의 특권이 선배 세대인 ‘386’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X세대’는 선배 세대인 ‘386’이 만들어놓은 대화와 토론, 공동체문화를 함께 향유했던 세대다.

단절의 관점이 아닌 계승의 관점으로 보면, X세대야 말로 386의 시대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막걸리에서 맥주로, 포장마차나 선술집에서 호프집이나 소주방으로 장소를 옮겼을 뿐, 아직 완결되지 않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물론 오락용 상업드라마에 너무 많은 리얼리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잘 안다. ‘X세대’의 리얼리티에 그들의 시대정신도 포함되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응답하라 1994’는 1990년대 중반 ‘X세대’의 소품을 치밀하게 진열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재밌는’ 드라마임이 분명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불혹의 ‘X세대’에게 완벽한 감동을 주기엔 역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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