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초상화가 부처님이라니?
다소 생뚱맞고 허당끼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숭고한 의미가 담겨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진실함이 강하게 전해지고 심플한 표현이지만 강한 메세지가 저절로 느껴지기기 때문이다.
아내의 초상화를 부처님으로 묘사한 화가는 다름 아닌 장욱진(1917-1990) 화백이다. 제목도 아내의 법명인 진진묘(眞眞妙.1970)를 그대로 썼다.
진진묘는 아내 이순경 여사가 지나가는 말처럼 초상화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한 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불쑥 “옜소”하면서 내 놓은 그림이란다. 정월초 어느날 아내가 늘 집에서 혼자 예불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 그길로 덕소 화실로 직행, 7일 주야로 심음을 전폐하고 그린 그림이란다. 그리고는 병이 나 3개월을 드러누워 앓았다고 한다.
아내는 남편의 병세를 지켜보면서 불현 듯 불길한 생각이 들어 ‘진진묘’를 팔아버렸다. 화가는 이를 두고두고 아타까워했다고 한다. 후일 한 제자에게 '진진묘'는 집을 팔아서라도 되찾고 싶은 작품이라고 했단다. 화가에게 특별한 애정이 있던 작품으로, 굳이 금전적으로 계산할 것을 아니지만 2014년 서울옥션 온라인경매에서 5억 6000만원에 낙찰돼 한동안 작가의 최고가 기록을 보유했던 작품이다.
화백은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의미요, 술은 휴식”이라고 할 정도로 평생 그림과 술밖에 모르고 살았다. 그런 화가에게 아내는 삶과 예술의 후원자이자 동지였던 셈이다. 금강경을 곁에 두고 마음자리를 닦으며 생활전선에 나선 아내의 모습이 화가는 ‘살아있는 부처’로 여겼던 모양이다.
아내는 이런 화가를 보고 애잔함이 컸던 모양이다. 작품이 안 되고 내면의 갈등이 심해지면 열흘이고 스무 날이고 꼬박 강술을 마셨다. 아내는 이런 모습을 보고 마치 '숫돌에 몸을 가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 했다. 작가는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소모하고 가야 한다며 평생 뼈를 깎는 듯한 작업에 몰두 했다.
그림 속 부처는 녹색바탕의 후광 안에 안정적인 구도로 배치했다. 녹색의 원은 우주의 상징이자 불교의 공(空)을 상징하고 있다. 간결하게 검은 색 선으로 형체만 그린 부처는 화가의 그림이 그렇듯 심플하다. 군더더기는 최소화하고 골격만 남겼다. 구도자의 삶에서 용인된 진리·믿음·사랑만을 고운 이성의 체로 걸러서 새겨 넣듯 그렸을 것이다.
간결하게 그림을 완성한 후 마지막으로 그림 왼쪽 상단에 아내의 법명을 영문으로 새겨 넣었다.
화가가 작품을 완성한 후 죽도록 앓았던 것은 육체의 피로감이라기 보다는 정신적 산고의 후유증이라는 해석이 옳을 것이다. 진진묘의 본래 의미는 부처의 참된 이치를 깨우쳐 가는 사람이란 뜻이다. 화가가 아내의 초상을 부처로 묘사한 것은 서로의 사랑이 부처가 중생을 대하듯, 중생이 부처를 대면하듯 숭고한 마음과 경외심을 함의하고 있음이다.
아내를 부처로 묘사한 것은 작가의 남다른 불교와 인연도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작가는 1933년 일본인 선생과 마찰로 다니던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성홍열에 걸려 6개월 동안 예산 수덕사 만공(1871~1946) 대선사 밑에서 지낸 적이 있다. 어린 나이에 불교를 접한 탓이었을까 평소 선문답 같은 말을 잘 했다고 그의 제자들이 말하곤 했다.
1970년대 후반 경봉(1892∼1982) 스님을 만났을 때 선문답 일화가 전한다. 스님이 대뜸 "뭘 하느냐"고 묻자 "난 까치를 잘 그립니다"라고 답하자 스님은 "쾌하다"고 받았다. "입산(入山)을 했더라면 도(道)꾼이 됐을 것인데‧‧‧" 하자 "그림 그리는 것도 같은 길입니다"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스님이 그의 그림을 보고는 무릎을 탁 치면서 여기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도 우주가 다 있다고 했단다. 그때 내려준 법명이 '비공(非空)'이다. 비공은 '무아무인관자재 비공비색견여래(無我無人觀自在 非空非色見如來)'라는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골자인 공사상을 대구로 축약한 것에서 나온 단어다. 직역하면 '나도 없고 남도 없어야 관세음보살을 볼 수 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어야 여래를 볼 수 있다'는 의미다.
부처님 오신날과 가정의 달을 맞아 이 고장 출신 화가 장욱진의 '진진묘'를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간단하게 설명해 봤다.
화가는 충남 연기군 동면 송용리(현 세종시) 출신으로 동경 유학 후 국립박물관 학예실과 서울대 교수로 길지 않은 기간 근무한 후 평생 심플한 동화 같은 그림을 그려 근현대화단을 대표하는 국민화가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