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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분 토론의 원조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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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분 토론의 원조 소크라테스
  • 정승태(침신대 종교철학 교수)
  • 승인 2013.02.28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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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분 토론의 원조는 누굴까. 아마도 서양철학자 중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기원전 469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399년에 죽은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어떠한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생각했고 어떤 말을 했는지는 그의 출중한 제자들인 플라톤, 크세노폰,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플라톤은 상상력이 뛰어난 문학가였으며, 크세노폰은 전문 군인이었고, 아리스토파네스는 패러디 전문가였다. 추측컨대 이들 세 사람은 ‘정품’이 아닌 ‘짝퉁’ 소크라테스를 만들 충분한 소질을 겸비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확실하게 알려진 그의 삶에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무얼까. 그건 소크라테스가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하기’다. 정확히 말해 독백이 아닌 대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철학자의 이미지는 골방에서 혼자 사색에 잠기거나,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우주의 무한한 사변적 진리를 글에 담는 그러한 이미지를 떠올리기가 쉽다. 놀랍게도 서양철학의 대부로 숭배되는 소크라테스는 이런 고독한 철학자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그가 가장 좋아했고 죽기 직전까지 했던 것은 토론이다. 즉 어떤 주제에 대하여 논쟁적 대화를 하는 거다. 그는 아테네 토론의 광장 ‘아고라’에 나가서 어느 누구와도 격의 없이 대화하기를 즐겼다. 플라톤의 대화편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나이 불문, 재산 불문하며 대화를 좋아했다고 한다. 나아가 아테네의 법이 이 즐거움을 금지시키면 자신은 법을 지키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고 하니 얼마나 그가 이야기하기를 즐겨했을까 가히 짐작이 간다.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의 이런 대화를 재미있게 구경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를 따라 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현명하다고 여겼던 사람의 무식이 폭로되는 토론’은 실로 재미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토론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 중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고, 이것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이처럼 토론을 즐긴 이유는 단순히 상대방의 무식이나 현명하지 못함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즉 철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덕(virtue)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덕의 실천은 재산이나 직위 그리고 명예보다도 중요하며 심지어 죽음도 방해할 수 없는 인간됨의 본질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진정한 토론은 성찰의 과정 후에 오는 덕의 소중한 선물이다. 단지 말만 잘하는 것은 논쟁으로 상대를 이길 수 있어도 상대를 설득할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를 경멸한 이유는 뭔가. 이유는 간명하다. 그것은 소피스트들이 무엇보다 영혼을 계발하는 철학을 돈과 결부시켰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단순히 말의 논증이 아니라 덕을 겸비한 설득이 그의 토론의 가장 중요한 방식이었다. 그래서 그가 추구하는 것이 ‘지행합일’의 덕목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칠까. 크게 두 가지일 듯싶다. 하나의 가르침은 인간됨일 것 같다. 2006년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새로운 총장이 선출되었다. 그의 이름은 드류 파우스트(Drew Paust)였다. 하버드대학의 역사학 여교수였던 파우스트는 수락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학의 목적은 목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목수를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다." 이 얼마나 명쾌한 말인가.
우리 시대에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선이 무엇이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점을 소크라테스는 간파했다. 선이 무엇인지 안다면 결코 악행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뭔가. 그것은 아마도 기능적 인간인 목수다. 기능적 목수는 가르친다. 하지만 인간됨은 대화의 상대방에 관심한다. 만일 우리 시대가 소크라테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라고 묻는다면, 그로부터 돌아오는 답은 뭘까. 그건 아마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까.
또 다른 하나의 가르침은 대화를 통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는 길일 것 같다. 지식의 방식은 대화다. 대화는 어렵다. 서로 다른 환경과 배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대화를 통해서 상대의 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된 지식은 대화를 통해서 지식에 도달하는 방식이다.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 우리는 먼저 억측을 버려야 한다. 억측을 버리는 길은 단순하다. 먼저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무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대화의 기본이다. 하지만 말보다 쉬운 게 있을까.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하나의 논법을 소개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너 자신을 알라’는 논법이다. 대화는 우리 자신을 인식하면서 출발한다. 그래야 상대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억측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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