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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지역에 남긴 상처2-남면 양민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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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지역에 남긴 상처2-남면 양민학살
  • 홍석하
  • 승인 2012.06.26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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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면 갈운리 은고개 양민학살... 유가족 누명과 원한 보듬고 위령비라도 세워야

남면 갈운리 은고개 양민 300명 억울한 죽음 위령비라도 세워야...

1950년 7월 8일 밤. 양민 300 여 명이 영문도 모른체 군경에 의해 사살됐다. 시체는 그들이 판 구덩에 묻혔다. 구덩이속에서 살려달라는 절규가 3일간이나 계속 됐지만, 아무도 그곳에 갈 수가 없었다.

무섭기도 했지만 죽은이들과의 관련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한 사람들은 보도연맹원들이다. 그들의 죄라면 보도연맹 가입원서에 지장을 찍은 죄랄까?

보도연맹은 당시 정부에서 만든 단체로 공안검사로 유명했던 오제도, 선우종원이 주도해서 만들었고 가입을 하면 과거 좌익활동과 부역한 일을 묻지 않고 새 삶을 보장해 주겠다는 취지로 조직됐다.

죽은사람 중에는 당시 경찰과 안면이 있어 살려 주려고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오라는 말을 듣고도 죽음의 그림자를 피하지 못하고 순진하게 새 옷을 입고 가서 죽었다고 한다.

미군 스미스부대원 517명이 전의 개미고개에서 인민군에 몰살당할 즈음 연기군 남면에서는 끌려온 보도연맹원들이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철사 줄에 묶여 죽어 갔다. 코흘리개 자식들과 젊은 색시들을 남겨둔채…….

살아남은 가족들은 죽은 자들의 원한보다도 더 큰 고통 속에서 풀뿌리, 나무뿌리, 아카시아 꽃으로 허기를 채우며 항의도 변명도 못한 채 어떤 이들은 고향을 등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62년의 세월을 벙어리로 울분을 삭이며 형제와 부모를 원망하며 살아왔다. 한 동네 만도 몇 집이 같은 날 제사를 지내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여든이 넘은 어느 유족은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꺼이꺼이 울음을 터트렸다. 이런 놈의 정치가 어디있냐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그해 충격으로 돌아가셔 코흘리개 동생을 업고 4형제가 얼마나 고생이 심했던지 하염없이 쏟아내는 가슴 저미는 통곡소리를 듣고 있어도 기자는 그 고통을 다 알 수 없었다.

양지에 위령비조차 세울 수 없었던 남면 갈운리 수멍재학살사건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9년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밝은 세상에 공개됐다.

예비검속에 이은 총살행위는 대전․충남 전역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됐으며 이에 대한 충남 경찰국의 지시나 명령은 상부기관인 내무부와 국방부 및 계엄사령부로부터 위임된 것으로 볼 수 있어 그 책임은 이들을 관리해야 할 국가에 있다. 위원회는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면서 국가의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을 권고했다.

예비검속

연기군의 예비검속은 전쟁 발발 이튿날 조치원경찰서로부터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당시 조치원경찰서 금남지서 주임 서모씨의 진술로 미루어 6월 26일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연기군 동면 갈산리 주민 진모씨 등 약 15명은 전쟁 발발 후 동면지서 순경으로부터 소집명령을 받는다. 조치원읍 신안동 2구 주민 김모씨 등 3-4명은 전쟁 발발 후 10일도 채 지나지 않았을때 소집명령을 받고 나갔다.

이모씨는 "이들이 전쟁 전에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소집이 있었으며 소집에 응하지 않으면 진짜 빨갱이로 몰리기 때문에 대부분 소집에 자발적으로 응했다"고 말했다.

구금 각 면단위로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은 각 지서에서 조치원경찰서로 이송되어 조치원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했는데 인원이 너무 많아서 경찰서 옆에 있는 임시창고도 사용했다.

당시 금남지서 주임이었던 서모씨는"보도연맹원들을 잠시 지서로 오라고 통지하여 모아놓으면 몇시간 있다가 경찰서에서 트럭으로 그들을 데려갔다"고 했다. 서면 용암리 위즐마을의 현모씨는 7월7일 조치원경찰서에서 아버지를 면회한 것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학살 및 시신수습

연기지역의 보도연맹 관련지 학살일자는 1950년 7월 8일이 유력하다. 당시 갈운리 ‘수멍재’(현 남면 고정리 은고개) 현장 아랫마을에 살았던 참고인 신모씨는 "사살당일 저녁 때 쯤 경찰들이 와서 ‘사격 훈련하니까 나오지 마라. 나오면 큰일난다’며 주민들을 전부 집으로 들어가게 한 후 엄청난 총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이 지역의 희생자 유족들은 대부분 시신을 수습했는데 사살현장이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살규모와 신원 ‘비성골’ 현장에서 형의 시신을 수습한 참고인 정모씨는 "산등성 부근에 호를 약 60~70m 이상 길게 판 후 사람들을 꿇어 앉힌 채 총으로 사살하여 파묻었으며 현장에는 약 100여 구 정도의 시신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현장 근처에 살았던 갈운리 주민에 의하면 ‘비성골’에서 약 600~7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은고개’에서는 더 많은 시신이 있었으며 여자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했던 참고인 송모씨는 "구덩이 속에는 두 사람씩 손이 철사로 묶인 채 총을 머리에 맞아 죽어 있었다"고 했다.

참고인들의 진술을 토대로 연기지역의 희생규모를 추정하면 수멍재(‘은고개’와 ‘비성골’)에서 최소 300여 명 정도가 희생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성골’ 현장에는 최소 100여 구 이상의 시신이 있었으며 인근 ‘은고개’에는 더 많은 시신이 있었다는 현장 목격자들의 진술이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희생자 명단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부만 유족들이 나서 조사에 응하고 제적부를 통해 신원을 최종 확인했다.

일부 유족은 아직도 당시의 상황에 대해 발언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들은 희생자 확인을 위한 제적부의 제출을 거부하거나 심지어는 조사받기를 원하지 않는 유족도 있었다.

한편, 참고인의 진술로 보아 희생자일 개연성이 높으나 유족 미확인 등으로 신원확인을 하지 못해 ‘희생자 확인’을 못한 경우도 있는데, 연기군 조치원읍 신안동, 서면 용암리, 서면 기룡리 등 15명이다.

학살의 주체

참전경찰과 현장 부근 마을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총살의 주체는 당시 조치원경찰서 및 옹진경찰서(공주) 직원일부이며 일부 17연대 국군도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종촌지서에 근무한 참전 경찰 홍모씨는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은 그 후 처형명령이 내려와서 후퇴하던 옹진서원들이 대리로 처형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종촌지서의 김모씨는 "당시 금강 외곽경비로 차출되어 보도연맹원 처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나 수복 후에 수멍재에서 처형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또한 참전군인 김모씨는 "후퇴하던 17연대가 연기군 대평리와 금강교 부근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렀는데 그때 중대장으로부터 피난민 중에 섞여 있는 보도연맹원을 색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 주민 송모씨는 "17연대 군인들이 연기와 공주의 접경지역인 나성리 부근에 주둔하였으며 이들이 장기면 산학리의 지방빨갱이(보도연맹원)들을 사살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이러한 여러 증언을 고려할 때 당시 연기지역에 후퇴하여 머물던 국군 17연대와 옹진경찰서가 조치원
경찰서와 협력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종 조사결과 연기지역 보도연맹원 300여명은 1950년 6월26일경부터 지서 별로 소집, 체포되어 일부는 대전형무소로 이송되고, 나머지는 조치원경찰서 유치장 및 인근 창고에 얼마간 구금되었다가 7월 8일경 연기군 남면 갈운리 수멍재(‘은고개’와 ‘비성골’)에서 제17연대(옹진부대) 및 옹진경찰서, 조치원경찰서 소속 경찰들에 의해 사살됐다.

이밖에 전동면 봉대리 ‘먹뱅이’ 지역에도 학살사건이 있었는데 희생규모는 현재로는 알 수 없다. 단지 당시 ‘트럭한 대라는 소문을 들었다’거나 ‘현장 입구에 가지런히 벗어놓았던 고무신, 치약 등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증언으로 미루어 50여 명 내외의 희생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먹뱅이’ 지역의 희생자들은 타지방의 보도연맹원이라는 진술이 있는데 위쪽의 천안이나 인근 충북지역의 보도연맹원일 가능성이 있다.

取材後日談

‘은고개 학살사건’이 지역에 알려지게 된 것은 경상대학교 신경득교수의 ‘조선 종군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 논문 때문이다.

논문에는 연기지역에 158명에 달하는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고 밝혔고 2005년 지역의 시민단체가 남면 등 현지 실사를 통해 사실임을 확인했다.

조치원과 서면, 남면에서 20명의 유족들을 만났고 피학살자도 300명에서 500명까지 추정하게 됐는데 행정도시 싸움에 휩쓸려 조사는 중단됐다.

정부의 조사로 실체가 드러나고 이를 취재를 하는 동안 80세 안팎의 증인들은 당시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했고, 피멍든 가슴으로 살아 온 유족들은 말을 아끼며 지금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집집마다 줄초상을 당해 한날한시에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누구하나 작은 위령비라도 세우자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분들은 끔직한 학살의 공포 속에 갇혀 있었다.

개미고개에서 전사한 미군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군수가 참여하는 기념식을 치루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국민통합과 화해와 협력, 통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과제다. 아직도 원한과 공포 속에 살아가는 양민학살 피해자들을 위한 정부의 실질적인 명예회복 조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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