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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갑질’은 학습된 횡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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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갑질’은 학습된 횡포였다
  • 박권일 시사칼럼니스트(‘88만원 세대’ 공저자)
  • 승인 2015.01.06 1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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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소수의견 | ‘땅콩리턴’ 사건의 의미

항공기 추락 수준의 이미지 타격
법적 처벌 없으면 유사사례 재발
사회적 제재, 철저한 학습시켜야


‘땅콩리턴’ 사태의 후폭풍이 거셌다. 외국 언론들까지 가세하면서 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됐다. 여러 매체와 피해자,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단순히 몰지각한 기내 소란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의 인권유린과 운항방해가 일어났다. 이 황당한 난동의 장본인은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장녀인 조현아 씨다. 조 씨는 대한항공 기내 서비스, 호텔사업 부문 총괄부사장이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직함으로는 대한항공 부사장이었다.

사태가 진행되는 내내 대한항공과 조현아 씨 측은 최악의 대응을 반복했다. 일을 더 키우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증거들이 속속 나오는 가운데 보도내용을 완전히 부인하고, 사태 직후에 본인이 직접 나서서 사과하지도 않았다. 조 씨가 부사장에서 물러나는 과정도 마치 여론의 ‘간을 보는’ 것처럼 비쳤다. 비난은 비난대로 다 받으면서 실리도 놓쳤다. 이번 일로 대한항공은 거의 여객기 추락사고 수준의 이미지 타격을 입었다. 한 마디로 말해, 거대한 재벌을 이끄는 오너 일가의 판단이라 보기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멍청했고 무능했다.

언론과 대중은 소위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집단이 파렴치한 행위를 하거나 심각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 “모범을 보여야할 사회지도층이 어떻게 보통 사람만도 못한가”에 대해 한탄한다. ‘사회지도층’이라는 말부터가 가소로운 단어지만(대체 누가 누굴 지도한단 말인가!) 사회적 위계의 상층에 있는 자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윤리적이고 명석할 거라는 모종의 기대나 믿음, 혹은 그래야한다는 당위는 오랫동안 널리 유통되어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즉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에 관한 이야기도 비슷한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켜왔는데, 사실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들이 인류 전체에게 저지른 악행의 총목록을 작성한다면 그들의 선행이나 도덕성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미미하단 사실을 금세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비도덕적일지 몰라도 유능하기 때문에 엘리트이고 사회지도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이들에게 줄리언 어샌지의 위키 리크스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위키 리크스가 우리에게 알려준 가장 심오한 진실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바로 이것이다. 세상이 정교한 음모의 씨줄과 날줄에 엮인 코스모스(cosmos)가 아니라 생각보다 훨씬 허술하게 굴러가고 있는 카오스(chaos)라는 것. 저 문서 속에 민낯으로 등장하는 많은 엘리트들은 세계의 질서를 관장하는 전능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실수와 판단착오를 되풀이하는 구제불능의 멍청한 존재들이었다.

이상한 미신이나 신화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현실은 소위 ‘사회지도층’이 얼마나 철저히 무능하고 부패한 집단인지를 끊임없이 증언한다. 오히려 엘리트들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탐욕스럽고, 더 이기적이고, 더 파렴치하기에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면 조상 대대로 그래왔거나. 물론 어떤 나라의 소위 ‘사회지도층’은 다른 나라보다 도덕적이고 고귀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미덕이 아니다. 그들 자신은 스스로에게 부과한 윤리적 의무라고 믿으며 거들먹거릴 수 있겠지만, 큰 틀에서 본다면 사회의 시스템이 엘리트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것이다.

땅콩리턴 사태가 가리키는 진실은 그러므로 두 가지 명제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조현아 씨는 ‘사회지도층’의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 보편적 존재라는 것. 둘째, ‘사회지도층’의 갑질과 횡포는 학습의 결과라는 것. 이번 사태는 결코 조현아 씨 개인, 혹은 한진그룹 조씨 일가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삼성 이건희 일가의 탈법적 증여를 포함한 세습 과정들이 과연 땅콩리턴 사태보다 사회에 해를 덜 끼쳤을까. 그렇지 않다. 경제정의의 근간을 뿌리째 흔든 행동임에도 그들은 제대로 된 처벌조차 받지 않았다.

조현아 씨도 지금 여론의 강한 비판에 직면했지만 법적 처벌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한국사회에서 소위 ‘사회지도층’의 횡포와 패악이 유난히 잦고 심하다면, 그것은 한국 사회지도층이 생물학적으로 특별히 사악해서라기보다 그렇게 행동해도 지금껏 별다른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스크가 작기 때문에 그런 짓을 반복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러니 가끔 처벌을 받아도 잘못했다는 생각보다 재수가 없었다는 생각만 한다. 소위 ‘사회지도층의 갑질’은, 그야말로 철저히 학습된 횡포였다. 무엇이 필요한가? 사례를 축적해야 한다. 불법, 탈법, 상궤를 벗어난 횡포에는 당연히 사회적 제재가 따른다는 것을 그들에게 철저히 학습시켜야 한다. 땅콩리턴 사태의 최종 결과에 주목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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