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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타국생활...냉기 감도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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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타국생활...냉기 감도는 듯
  • 변상섭 기자
  • 승인 2024.02.0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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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규 작 31번 창고
조양규 작 31번 창고

고독과 피곤, 쓸쓸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마치 고된 하루 일과에 녹초가 된 현대인의 자화상 같다. 이미지는 동시대적이지만 70년쯤 지난 그림이다.
조양규(1928-?)의 ‘31번 창고(1955)’다.
작품 감상의 키워드는 곧 작가의 이력이다. 삶이 파란만장하다. 진주사범을 졸업하고 부산에서 교편생활 중 제주 4·3사건에 연루되면서 1948년 일본으로 밀항을 했다.
일본서 창고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작품활동을 하던 작가는 1968년 어느 날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북송선을 탔다. 그 후 1년간 체코 유학을 한 후 행방이 묘연하다.

조국이 있지만 철저한 경계인이자 주변인으로 산 것이다. 그는 북송 전 “조선의 풍경도 조선인의 풍모와 거동도 기억과 상상을 통해서 밖에 알 수가 없는 게 내게는 답답한 일이다. 북조선에서는 도구도 표현도 일본보다 자유롭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공중에 매달린 듯 어중간한 지금의 상태를 벗어나 조국의 현실 속에서 싸우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좌익활동에 가당한 이유로 남쪽을 택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북송선을 타게 된 지식인의 고뇌와 안타까운 심정이 배어 있다. 10년간 일본 생활을 했지만 역량 있는 화가로 성공할 만큼 현실 적응을 제대로 못한 나머지 북송을 귀국으로 여긴 모양이다.

작품은 고단했던 일본 생활의 편린이다.
큰 몸통과 팔다리에 비해 머리는 지나치게 작다. 소외된 삶과 자아가 결핍된 육체 노동자를 그렇게 묘사했다. 배경은 육중한 철문이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창고 안은 칠흑처럼 어둡다.

이방인의 고단한 삶을 은유하는 듯 냉기가 감도는 분위기다. 어둠은 노동을 통해 얻은 결과물들을 빼앗아가는 통로는 아닐까. 손에 들려 있는 채워지지 않은 홀쭉한 자루가 이를 암시하는 듯 하다.

푸른색과 빨간색으로 쓰려진 숫자, 짙은 어둠을 상징하는 검은 색이 , 마치 미라같은 모습의 인물이 주는 느낌이 왠지 섬뜻할 정도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주인공인 이명규의 실제 모델이 조양규라는 얘기도 있다.

이념갈등과 남북분단으로 잊혀진 비운(悲運)의 디아스포라 화가다. 그런탓에 남겨진 작품도 빈약하다. 31번 창고를 비롯해 십여점에 불과하다고 한다.  

남겨진 작품은 몇 안되지만 꽤 유명세를 타고 있다. ‘31번 창고’도 한 미술잡지가 선정한 ‘한국 근대 유화 10선’에 오른 작품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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