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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에서 통찰을 길어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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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에서 통찰을 길어올리다
  • 세종포스트
  • 승인 2014.11.24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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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픽션·논픽션 넘나드는 솔직한 여행 기록


제프 다이어(56)는 소설보다는 논픽션으로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영국 작가다, 라고 쓰면 그는 아마도 화를 낼 것이다. 픽션과 논픽션의 구분 자체를 거부하는 이 작가는 소설과 에세이와 르포르타주를 혼융한 독특한 글쓰기를 선보여 왔고, 번득이는 유머와 깊은 통찰로 무장한 이 장르 파괴의 글쓰기는 그의 문학적 시그니처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글쓰기는 대체로 무엇 무엇에 가까운 장르로 임의에 따라 분류될 수 있을 뿐이다. E. M. 포스터 상, 서머싯 몸 상 등을 수상한 영국의 대표 작가로 일본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번역으로 소개된 바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소설가 한유주의 번역으로 사진 에세이 <그러나 아름다운>이 번역되는 등 서서히 이름을 알리고 있다.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Yoga for People Who Can’t Be Bothered to Do It)>는 일단은 여행기로 분류될 수 있는 책이다. 2003년 출간된 이 책은 유사한 스타일을 선보이는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최고의 에세이로 주저 없이 꼽는 작품으로, 세계 각지의 폐허를 찾아다니며 시간에 대한 통찰을 길어 올린 기록들이다. 하지만 그 기록들이 놀랄 만큼 격의 없고 진솔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읽는 동안 여러 번 작가의 얼굴 사진을 들춰보게 만든다. 타인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마저 숨기지 않고, 마약과 섹스까지도 상세하게 묘사하는 탓에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 걸까 염려스럽지만, 작가는 노파심 많은 독자들을 위해 “이 책에 적은 일들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그 중 몇몇은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났다”고 미리 밝혀두었다. “글쓰기는 일종의 자기 보상,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아 생긴 빈자리를 메워주는 방법이기도 하”므로, 픽션과 논픽션은 언제나 물과 잉크처럼 섞인다.


‘나는 무너지고 있다’는 처절한 자각에 속박돼 있던 작가가 폐허를 주제로 삼은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 파티와 약물, 축제 등에 탐닉하며 반문화의 전사처럼 살아온 그는 고대의 폐허 로마에서 시작해 후기 산업화 시대의 새로운 폐허 디트로이트까지 세계 곳곳의 폐허들에 이끌린다. “불꽃과 야망, 희망으로 가득 찼던” 20대와 “그 희망들이 고통의 원인이 되었던 30대”를 보내며 이미 그 자신이 폐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폐허에는 “미래는 결국 이런 모습이 될 거라는 거의 예언 같은 느낌”이 있다. 그곳에 가면 “역사를 지리처럼 경험하는 것, 시간적인 것을 공간적인 것으로 경험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로마에서 시작한 여정은 리비아의 렙티스 마그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인도네시아 발리, 태국 코팡안,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미국 뉴올리언스와 마이애미의 사우스비치 등으로 이어진다. 물론 순차적인 것은 아니고, 그때그때 여행의 기록들을 묶은 것이다. 연인과의 여행도 있고, 언론사에 기고하기 위한 취재여행도 있으며, 글쓰기를 위한 낯선 곳으로의 장기 체류도 있다. 작가는 이 모든 곳에서 친구를 사귀고 때로는 연인을 만든다. 오랜 세월 떠돌며 살아온 삶의 미덕이다.


일체의 가식 없이 캐주얼한 작가의 태도는 유머와 직결돼 있어, 이 독서에서 폭소 공습은 거의 상시적이다. 암스테르담에서 마리화나에 취해 비에 젖은 바지를 갈아입는 장면을 보자. 좁은 칸막이 화장실 안에서 젖은 바지를 벗었다가 낑낑대며 다시 입은 바지가 젖은 바지여서 새 바지를 힘겹게 입고 보니 뒤집어졌다. 뒷사람은 “도대체 왜 이렇게 화장실을 오래 쓰냐”며 노크를 해대고 작가는 엉겁결에 “좋은 질문입니다!”라고 소리 지른다. “지성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나토의 세르비아 폭격에 동의할 수 있냐”는 파리지엔의 항의에는 “내가 지성인이라고 누가 그럽디까?”라고 받아 친다. 거리에서 마주친 미국 청년이 외국인으로 오해하고 “영어 하세요?”라고 물으면 “아주 잘하지요“라고 응수하는 이 삐딱한 작가가 말문이 막힌 때는 “필요 없다”고 내친 길거리의 비아그라 밀매상이 “필요하실 것 같은데”라며 따라붙을 때뿐.


“늘 발작 상태였기 때문에 공황 발작이 일어나지 않은” 사람이 폐허에서 던지는 농담, 그것도 눈물을 뚝뚝 떨군 후에 툭툭 내던지는 세련되고도 날렵한 유머는 “행복을 느끼는 능력 말고는 인생을 판단할 기준이 없다”는 이 책의 주제를 강렬한 대비 속에서 부각시킨다. 행복은 어딘가에 가면 있는 것도, 성취해야 할 그 무엇도 아니라, 기술 연마를 통해 계발해야 하는 하나의 능력이다. 그 능력만 있다면 몰락과 쇠퇴 속에도 인간은 행복하다.


때때로 가장 훌륭한 글감은 매력적인 작가 그 자체이기도 하다. 제프 다이어의 이 책은 바로 그 또렷한 사례다.


<제휴기사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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