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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 우리말·글 잃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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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 우리말·글 잃으면…
  • 김학용(디트뉴스24 주필)
  • 승인 2014.08.11 1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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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한글 간판 늘어나는 연변
중국학교로 입학하는 조선족 늘어
조선족 자치주 유지 힘들 수도


동방문화진흥회와 함께 백두산에 다녀왔다. 첫 방문지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州都) 연길(延吉)이었다. 연길 공항을 빠져 나오면서 첫 눈에 들어온 것은 한글로만 된 안내문이었다. “공사중 불편한 점 량해 부탁드립니다.” 공항 청사 일부가 수리 중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주변 광고판을 둘러봐도 한글의 위세는 꽤 당당해 보였다. 모든 간판은 한글과 한자로 병기되고 있었다. 간판 위쪽에 한글로 쓰고 아래쪽에 한자로 쓰거나, 한글을 왼쪽에 쓰고 한자를 오른쪽에 붙였다. 조선족 가이드는 간판 규정이 그렇게 돼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글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조선족 자치주에 속한 돈화시(敦化市)에선 한글 병기를 지키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규정 때문에 한글을 함께 쓰지만 한문을 위쪽에 더 크게 쓰고 한글은 아래에 작게 쓴 간판이 많았다. 한글은 아예 빼 버리고 한자만 쓰는 경우도 있었다.


돈화시에는 청나라 황제들을 모신 ‘청조사(淸祖祠)’가 있다. 만주족의 역사와 문화를 기리는 공간으로 2011년에 문을 열었다. 청조사 바로 앞의 부조물에 내걸린 안내표지는 한글의 현주소를 알려주었다. ‘금지등반하여넘다’라는 한글과 함께 ‘禁止攀越’(금지반월)이라고 쓰여 있었다. 영어(Prohibiting Climbing)로도 적고 월담금지 표시까지 넣었으니 누구든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팻말이 한글로만 적혀있다면 이게 무슨 소린가 했을 것이다. ‘금지등반하여넘다’는 한문을 한글식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가이드는 “돈화시에는 병기 규정 때문에 한글을 함께 쓰지만 엉터리 간판이 많다”고 했다. 간판조차 제대로 만들 수 없을 정도로 한글을 모르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한다.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다. 조선족 한글도 현지화(現地化)는 불가피하다. ‘한자식 한글’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디선가 <여가여관 如家旅館>이란 간판도 눈에 띄었다. 내 집같이 편안한 여관이란 뜻일 게다. 그 정도면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나 지금 조선족 한글은 단순한 현지화가 아니라 사라져 가고 있다. 한글은 ‘의미 없는 부호’로 전락해 가고 있다.


한글뿐이 아니다. 말도 사라져 가고 있다. 조선족 자치주에는 조선말로 가르치고 배우는 조선어학교가 아직은 적지 않다. 연길에만 1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어학교에 입학하는 조선족 학생은 계속 줄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시발점은 조국(남한)한테 있었다. 조선족들은 TV생중계로 88서울올림픽을 지켜보면서 조국의 발전상을 알았고, 너도 나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현재 조선족 인구 210만 명 가운데 40만이 한국에 나와 있다. 그 자리를 한족(漢族)들이 메우면서 60%가 넘던 조선족 비율은 40%로 줄었다.


무엇보다 한글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중국의 경제성장이다. 조선족 학생들은 더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중국 경제의 중심인 상해나 북경으로 진출하려 한다. 그러려면 초등학교부터 조선어학교보다 중국학교에 들어가는 게 유리하다. 중국학교에 다니면 조선어보다 중국어를 더 쓰게 된다.


거기서도 농촌 총각들은 장가드는 게 힘들어졌다. 한국과 다르지 않다. 돈 많은 농촌 총각 중엔 한족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는 다문화 가정으로 전환을 의미한다. 조선족끼리 결혼하던 관행이 깨지면서 한글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한글에 대한 ‘정치적 위험성’도 점차 커지고 있다. 돈화시는 조선족 자치주에서 떨어져 나가려 하고 있고, 돈화시의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조선족 자치주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


말과 글을 잃은 민족의 처지는 만주족이 잘 보여준다. 청(淸)을 세워 중국을 호령하던 만주족은 자기 말과 글을 잃어버렸다. ‘위키백과’는 중국내 만주족 980만 가운데 만주어를 완전히 알 수 있는 사람은 20명이 안 된다고 설명해놓고 있다. 그들에겐 역사만 있을 뿐 미래가 없다. 말과 글을 잃어버리면 자신을 되찾을 방법이 없다.


조선족이 우리말과 글을 잃어버린다 해도 그들에겐 모국어를 쓰는 조국이 있다는 점이 만주족과는 다른 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말과 글을 잃어버리고 한족과 동화되어 살아간다면 계속 조선족으로 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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