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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최전선에서 지역 정치까지, 굳세어라 현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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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최전선에서 지역 정치까지, 굳세어라 현자씨
  • 한지혜 기자
  • 승인 2019.03.05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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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성의 날 특집] ② 7080 여성노동사 반도상사 장현자

1908년 3월 8일, 미국 여성 노동자 1만 5000명이 손을 맞잡고 광장으로 나갔다.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은 1910년 열매를 맺는다. 국제연합(UN)은 이날을 세계 여성의 날로 공식 지정했다.

오는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 제111주년이다. 노동계와 종교계, 시민사회 곳곳에서 평등과 여성 인권을 주제로 한 행사가 개최된다. 세종시는 호수공원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열린다.

세종에도 비슷한 길을 걸어갔거나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의 날 주간을 맞아 1970년대 노동운동 선봉에 섰던 여공들, 새로 출범한 세종시에서 여성운동의 길을 가는 사람, 10대 고교 페미니스트를 차례로 만나본다.

세상은 어떤 여성들이 바꿔왔는가. <편집자 주>

① 7080 여성노동사 원풍모방 임선호

② 7080 여성노동사 반도상사 장현자

장현자 반도상사 전 노조지부장.

[세종포스트 한지혜 기자] 기계가 돼라. 주는 대로 받으라. 토 달지 말라. 1970년대 당연시된 노동 현장에 반기를 든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노조 창립과 동시에 첫 여성 노조지부장 배출이라는 역사를 가진 반도상사. 1970년대 노동운동 최전선에 있던 장현자(68) 전 노조지부장이 세종시에 산다.

장 전 지부장은 반도상사가 처음 세워진 1969년 열여덟에 입사, 노조 창립과 해산까지 10년 역사를 함께 썼다.

20세기 한강의 기적을 만든 건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들 한다. 사실 이 보이지 않는 손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아니라 쉴 새 없이 기계를 돌린 노동자의 손이 아니었을까?

#. 예상 빗나간 여공들의 반란

투쟁 중인 반도상사 노동자들. (자료=국립민속박물관)

반도상사는 현재 엘지그룹의 전신인 럭키그룹 계열사였다. 당시 럭키금성은 5대 재벌기업 중 하나로 꼽혔다.

반도상사는 소위 여성 노동자들이 선망하는 회사였다. 기숙사를 포함한 회사 내 편의시설이 남부럽지 않게 잘 갖춰져 있었기 때문.

그는 “당시 가발, 원단 등 제조업 사업장에는 여성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며 “1970년대 경제 성장은 실질적으로 여성 노동자에 의해 이뤄졌다는 경제학자들의 분석이 있다. 최고 호황기에는 3000~4000명까지 공장에서 일했다”고 말했다.

1971년 3월 공장건물을 신축하고 난 뒤 노동자 수는 2000여 명까지 늘었다. 가발경기 호황이 이어지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철야 작업을 했다. 이때 노동자 수는 4000여 명에 달했다.

주·야간 2교대로 일하며 불어터진 국수로 점심을 때웠다. 관리자들의 폭언과 폭행은 일상이었다. 기숙사에 사는 노동자들은 말 그대로 ‘봉’이어서 아무 때나 불러 일 시키는 날이 빈번했다.

장 전 지부장은 “노동자들의 인권이 지금과 비교하면 바닥이었던 시기”라며 “욕하면 욕하는 대로, 차이면 차이는 대로 일했다. 시시티브이(CCTV)로 감시당해 화장실을 가거나 물이라도 마실라치면 당장 그날 야단이 날아왔다”고 했다.

퇴근 시간이 되면 노동자들은 줄을 서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했다. 일종의 검신(檢身)이었다. 관리자들은 노동자가 가발을 훔쳐간다고 의심했다. 검신 시간만 매일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는 “명절 전날 검신을 받던 여성 노동자가 경비원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쓰러져 뇌진탕 판정을 받았다”며 "이 사건이 도화선이 돼 근로 환경, 저임금, 연장근로 등 노조 출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고 했다.

첫 농성 당일인 1974년 2월 26일 1500여 명의 여성 노동자가 모였다. 박정희 정권 시절 첫 긴급조치가 내려진 시점이 1월 8일인 점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살벌한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는 “단순히 억울하고 안 되겠다 싶어 한마음이 돼 농성이 일어났다”며 “당시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무엇을 이뤄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때였다”고 했다.

농성 당일 오전 장 전 지부장은 호소문을 들고 서울 유명 신문사를 찾아다녔다. 간절한 요청에도 언론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는 회사로 돌아와 농성에 합류했다. 이날 밤 11시가 돼서야 노조 결성, 강제 잔업 금지, 작업장 환경과 기숙사 시설 개선, 폭행 사원의 사과, 농성에 대한 처벌 금지 등을 담은 합의서가 작성됐다.

#. 난생 처음 잡혀간 남산, 아수라장 된 일터

장현자 전 지부장이 소장하고 있는 반도상사 노동조합 일지. (사진=국립민속박물관)

혹독한 시련이 시작된 건 이때부터다. 농성 후 간부진이 드러나자 노골적인 탄압이 시작됐고, 중앙정보부 관계자가 사업장으로 들이닥쳐 농성 주도자들을 색출했다.

장 전 지부장은 “일하던 중 관리자가 ‘친구가 왔다’며 나가보라 해서 갔더니 새카만 세단 두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며 “양쪽 팔을 형사들에게 잡혀 남산으로 끌려갔다. 아직 노조 창립도 되지 않았을 때”라고 했다.

형사들은 여공들이 모여 직접 작성한 호소문을 걸고 넘어졌다. 당시 산업선교회가 이들을 조종했다는 전제를 두고 “산업선교회 무리가 간첩이니 너희들도 간첩”이라며 겁박했다.

이후 회사는 노조 결성 과정에 개입해 경비실 남성 노동자를 지부장으로, 당시 노동자들을 이끌었던 한순임 전 1대 지부장을 부지부장으로 앉히려고 시도했다. 노동자들은 다시 꼬박 밤을 새며 반발했다. 그러자 돌아온 건 위력이었다.

그는 “밥도 못 먹고 농성하던 여공들은 몽둥이로 맞고, 기절하고, 응급실에 실려갔다”며 “기숙사 옷장에 숨어있다 끌려 나오고, 옥상에 올라가려다 못에 찔리고,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이날 20여 명이 연행됐다”고 했다.

3일 내내 끈질긴 조사가 이어졌다. 남은 노동자들은 농성을 이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1974년 4월 15일 노조가 결성됐다. 한순임 지부장, 장현자 부지부장 체제였다.

#. 신용협동조합 창립, 문화예술 꽃피운 ‘반도대학’

반도상사 노조에서 발간한 소식지 한마음회지 24호. (자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증자 (재)전태일 재단)

그는 이후 2대 지부장으로 선출됐다. 반도상사 노조를 이르는 다른 말은 ‘반도대학’이었다. 책이 귀한 시대에 책을 돌려보고, 독후감을 썼다. 한 달에 한 번 노조원들이 직접 글을 써 한마음 회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신용협동조합도 만들었다. 조합은 전세금 등 조합원의 목돈 마련을 도왔고, 각종 생활용품을 직거래 형태로 공동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생각해보면 당시 노조는 하나의 교육기관이었다”며 “문학과 예술, 사회 문제 등 모든 것을 배우고 토론했다. 당시 원풍모방, 청계피복 노조, 콘트롤 노조 등 모든 노조가 다 같은 분위기였을 것”이라고 했다.

바야흐로 1980년 서울의 봄. 이 시기에도 투쟁은 계속됐다. 중앙정보부, 부평경찰서 관계자들이 매일 회사로 출근해 그를 감시했다.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노동계 정화조치가 내려지자 노조 핵심 간부들은 다시 연행된다.

장 전 지부장은 “사무실에 키 큰 남자 두 명이 들어와 나를 찾길래 슬리퍼를 신은 채 그대로 부평시장으로 도망쳤다”며 “골방에 자취하던 친구 방에 숨었는데, 일주일 만에 씻기 위해 나가는 길에 형사에게 잡혀 반공법, 시위 주동 혐의로 부평경찰서로 끌려갔다”고 했다.

한여름 유치장에서 10일을 버텼다. 서울 수사본부를 거쳐 서대문 경찰서로 옮겨졌다. 그곳엔 노동계 정화조치로 끌려온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함께 노동 활동을 했던 동료들도 거기서 다시 만났다. 옆 방엔 서울 농대생들이, 그 옆엔 롯데 여성 노동자들이 수감돼 있었다

장 전 지부장은 “당시 수사받을 때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렸고, 고문실을 보여주며 엄포를 놨다”며 “박정희를 죽이고 들어온 김재규가 당시 조사받던 방이라고 했던 곳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1981년 회사는 노조원들을 전략적으로 해산시켰다. 수사관들은 당시 골목다방이라고 불렀던 노조의 아지트를 뒤지고 다녔다. 장 지부장이 풀려나 회사로 돌아가자 남은 노조원은 40여 명뿐이었다.

그는 “회사에서 고향으로 편지를 보내 당신네 딸들이 간첩 지시를 받아 놀아나고 있으니 빨리 데려가 결혼시키라고 했다”며 “최종적으로 3월 13일 노조 해체선언을 했다. 나 역시 그해 2월 결혼해 후임 간부들에게 노조를 부탁하고 성남으로 떠났다”고 했다.

#. 유일무이 여성 기초 의원, 무소속 당선까지

2002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대전 서구 기초의원으로 출마한 장현자 전 의원의 선거벽보. (자료=중앙선거관리위원회)

결혼 후 장 전 지부장은 경기도 성남 만남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곧이어 보육운동에도 눈을 떴다. 그가 워킹맘 문제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게 된 계기다.

그는 “당시만 해도 엄마들이 방문을 잠그고 아이들을 두고 일하러 나갈 때였다”며 “1991년 영유아보육조례 법령이 개정되기까지 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를 창립해 활동했다. 그때 나도 두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일했다”고 밝혔다.

남편을 따라 대전에 정착한 건 1991년이다. 그는 대전 성남동 성당에서 우리밀살리기운동, 농촌살리기운동을 이끌었다.

이후에는 살기좋은아파트공동체만들기 운동에 매진했다. 책을 모아 단지 내 도서관을 만들고, 품앗이 교육을 만들었다. 3년 전 세종으로 이주한 뒤에도 그는 새샘마을 5단지 입주자대표회장을 맡아 아파트 주민자치에 힘쓰고 있다.

특별한 이력도 있다. 2002년 지방선거 대전 서구의회 의원으로 당선돼 활동한 것. 당시 그는 대전 5개 기초의회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여성 의원이었고, 무소속으로 당선돼 화제를 모았다.

장 전 지부장은 “출마 전 2001년 아파트 운동으로 전국 여성 공동체 대상을 수상했다”며 “2006년까지 서구 의원으로 활동했는데, 다음 선거 때 정당공천제가 생겼다”고 했다.

정당공천제 시행 후 그는 다음 선거에서 낙선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정당공천제 폐지 공약을 들고 나온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를 이유막론 지지한 배경이기도 하다.

장현자 전 반도상사 노조지부장.

그는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내 삶은 평범한 여성의 삶이었을 것”이라며 “노조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지금 사회 곳곳에 퍼져있다. 반도상사는 내 일생일대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변화를 이끈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반도상사 노조탄압 사건 관련자들에게 민주화운동 명예증서를 수여했다. 반도상사 노조탄압 피해자 8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마침내 2012년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그는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반도 식구들을 볼 때면 가슴이 뭉클하다”며 “또 그 자식들이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주는 것을 볼 때면 그래도 잘 살았구나 싶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노동 최전선에서 지역 정치까지, 굳센 여성 현자 씨의 일대기. 그때 빨갱이 여공이라 불렸던 여성들은 손을 들고, 머리를 맞대고, 사람이 되겠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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