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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삶의 팔할은 ‘원풍’ 세종시 순댓국집 아지매[세계 여성의 날 특집] ① 7080 여성노동사 원풍모방 임선호

1908년 3월 8일, 미국 여성 노동자 1만 5000명이 손을 맞잡고 광장으로 나갔다.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은 1910년 열매를 맺는다. 국제연합(UN)은 이날을 세계 여성의 날로 공식 지정했다.

오는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 제111주년이다. 노동계와 종교계, 시민사회 곳곳에서 평등과 여성 인권을 주제로 한 행사가 개최된다. 세종에서는 호수공원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열린다. 

이곳 세종에도 비슷한 길을 걸어갔거나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의 날 주간을 맞아 1970년대 노동운동 선봉에 섰던 여공들, 새로 출범한 세종시에서 여성운동의 길을 가는 사람, 10대 고교 페미니스트를 차례로 만나본다. 

세상은 어떤 여성들이 바꿔왔는가. <편집자 주>

① 7080 여성노동사 원풍모방 임선호

세종시 조치원 무봉리 전통 순댓국 임선호(62) 사장

[세종포스트 한지혜 기자] 1980년 서슬 퍼런 신군부 시대, 겁 없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위해 470만 원을 모아 전달한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올해로 15년째 세종시 조치원에서 무봉리 전통 순댓국집을 운영하고 있는 임선호(62) 사장은 그때 그 여공 중 한 명이다. 1975년 열여섯의 나이로 원풍모방에 입사해 1982년 노조 해산까지 7년간의 시간을 노동 현장에서 보냈다.

신문에는 지명수배자로 낙인찍혔고, 9시 뉴스 전파도 탔다. 해직 이후에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지역을 전전하며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순댓국집 계산대 뒤에 걸려 있는 민주화운동 명예회복증서. 시골에서 올라온 여공은 마흔 살이 다 돼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원풍은 나의 학교

책 <원풍모방 노동운동사>에 수록된 원풍모방 기숙사생들 사진. 왼쪽 맨 아래 사람이 임선호 사장.

1970년대 농촌 여성들은 서울로 올라가 공장 노동자가 됐다. 농촌은 가난했지만, 도시는 역사 이래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제조업이었다. 원풍모방은 양복 원단을 만들고 가공하는 회사였다. 설비 관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임 씨는 “언니가 먼저 가서 일하고 있었던 원풍모방은 기숙사도 있고 목욕탕과 미용실까지 갖춘 시설로 인기가 많았다”며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 시절 노동 환경이나 노조 와해 공작, 탄압이 본격화된 곳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원풍모방은 1970년대 전설적인 민주노조로 꼽힌다. 1972년 전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돼 모든 단체 행동이 금지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10년간 유지돼온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갈아엎었다.

임 씨는 3교대로 일하면서 노조 소그룹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7~8명씩 모여 만든 소모임만 50~60개에 달했다. 그는 노조 내에서 쟁의부 차장, 부녀부 차장, 대의원 등을 맡아 활동했다. 돌아보면 원풍모방은 그에게 학교나 마찬가지였다.

탄압은 1980년대를 기점으로 거세졌다. 1980년 6월 원풍노조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위해 470만 원을 모았다. 기금은 당시 광주 희생자들을 도왔던 윤공희 대주교에게 전달됐다.

그는 “정부에 의한 노조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가 바로 1980년”이라며 “그때는 무서운 것도 모르고 마음이 모여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있던 시기 위험을 무릅쓰고 발휘한 연대 정신. (사)오월어머니집이 2007년 제1회 오월어머니상을 원풍모방 노조에게 수여한 이유다.

아수라장 된 82년 대림사거리

원풍모방 노조 탄압 중지, 노동자 복직을 요구하는 인쇄물(1982년 5월 17일자). (자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기증자 조성숙)

광주 모금 이후 당시 노조 지부장이었던 방용석 전 노동부장관은 같은 해 8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수배됐다. 노조 관계자들은 연행돼 강제 사표를 요구받았다. 노조 무력화를 위해 타 노조와 통합시키려는 시도도, 회사 남성 노동자와 갈등을 빚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는 “1982년 9월 노조 와해 작전이 시작되면서 사무실에 무단 침입해 폭력을 행사하고 물건을 부수는 일이 일어났다”며 “노조는 곧바로 농성에 돌입했지만 회사는 식당을 봉쇄하고, 물을 끊고, 고향의 가족을 데려와 해산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여공들은 그 와중에도 교대 작업을 하면서 농성을 이어갔다. 추석을 하루 앞둔 9월 30일은 농성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회사 연락을 받고 달려온 수 십명의 가족들이 농성장 앞으로 모였다. “어서 나오라”는 소리도 들렸고 “끝까지 싸우라”는 외침도 있었다.

임 씨는 “오후 6시가 되자 250여 명의 노동자들은 경찰과 회사가 고용한 폭력배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왔다”며 “대림사거리는 아비규환이 됐다. 여공들은 기숙사로, 화장실로, 담벼락으로 숨었다”고 했다.

10월 1일 새벽 4시, 정문 안쪽에서 마지막 농성을 이어가던 50여 명이 끌려나왔다. 이날 사건으로 노조 간부 8명이 구속되고, 55명이 구류선고를 받아 39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농성과정에서 약 200명이 병원에 입원했고, 500명의 노조원들이 해고를 당했다.

이날 9시 뉴스에는 기숙사에 숨어있었던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이 전파를 탔다. “여기가 어디라고 카메라를 들고 오냐”고 호통치던 임 씨의 모습도 그대로 방송에 나갔다.

이후 그는 지명수배 명단에 올랐다. 경찰을 따돌려 연행은 면했지만, 도망자 생활을 해야 했다. 노조원들은 수배 상태에서도 유인물 배포나 항의회 조직 등 투쟁을 계속해나갔다.

임 씨는 “농성 당시 경찰이 부모님이나 시골 면장을 데리고 와 끌고 가고, 집안에 공무원이 있으면 못살게 굴고 하는 식으로 해 동지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며 “동네엔 빨갱이로 소문이 나서 오갈 데가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도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청주에서 가사도우미 생활을 했다. 고향 세종시에 다시 정착한 건 20년 전 일이다. 15년 전 현재 조치원 무봉리 순댓국집을 차렸다.

남편이 직접 걸어준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증서

계산대에 서면 보이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증서. 임 씨의 남편이 액자에 넣어 직접 걸었다.

원풍모방 조합원 156명은 2007년 정부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안기부, 보안사, 검찰, 경찰 등의 노조 파괴 개입 사실도 확인됐다. 하지만 배상과 관련된 소송은 여전히 현재 진행중이다.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에서 1·2심 모두 승소했지만,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일부 위헌 판정을 받아 지난해 10월 재심을 신청했다.

계산대 앞 손님들의 시야에는 임 씨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증서가 들어온다. 남편이 직접 못질을 해 걸었다. 남편은 결혼할 때만 해도 아내의 노동운동 전력을 알지 못했다.

남편 장인국 씨는 “아내가 매년 모임을 서울로 자주 가니까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며 “기왕 결혼했고, 그 분야에 문외한도 아니어서 굳이 시비 걸 일이 없었다. 아는 후배가 마침 증서 이야기를 하길래 기왕이면 크게 걸자 해서 액자에 넣었다”고 했다.

(왼쪽부터) 남편 장인국 씨, 임선호 씨.

원풍모방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노동 문제에 관심이 많다. 그는 결혼하고도 콜드 콜택 노동 현장이나 평택 현대자동차 농성장을 찾았다. 지금도 매년 현장을 방문해 김장도 하고, 봉사도 한다.

원풍모방 노조원들은 그들의 마지막 농성이 시작된 9월 27일 즈음 매년 원풍동지회 모임을 갖는다. 임 씨는 올해 1월 속초 모임을 앞두고 목도리 20개를 직접 떠 동료들에게 선물했다. 30년 전, 그는 원풍모방에서도 뜨개질 소모임 활동을 했었다.

임 씨는 “원풍모방 노동자 100인의 구술 책 출간을 앞두고 있다”며 “결혼한 동료들이 지금은 자식들 시집 장가 보낼 나이가 됐다. 언제나 친형제 같은 친구들, 지금껏 살아온 만큼 앞으로도 잘 살아보자고 전하고 싶다”고 했다.

현재 그는 세종참여자치시민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사)세종여성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가게를 운영하던 어느 날, 지역 청년회 후배들과 인연이 돼 그의 이력이 알려지면서 후배들이 종종 그를 찾고 있다. 

임 씨는 “어느날 식당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후배들이 있었다”며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이야기를 터놓았다. 보잘것없는 나를 기억해주는 지역 후배들이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매일 아침 새벽에 출근해 8시면 가게 문을 연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냐 물으니 예순 사장은 ‘원풍’이라 한다. 

한지혜 기자  wisdom@sj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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