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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세이] 아버지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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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세이] 아버지의 바다
  • 박종우
  • 승인 2016.01.31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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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어느 겨울에


스무 살 어느 겨울에


한참 겨울이다. 겨울은 언제나 시작되는 지점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겨울의 중간에서 나는 봄을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겨울은 겨울로 그 자리에 항상 있다.


언제인지 모를 스무 살 어느 겨울이었다. 나의 스무 살 겨울엔 내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내일을 생각할 여유와 그 자그마한 여유를 만들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하루가 같은 하루로 그냥 그림자로 남아 있는 그런 어떤 해의 겨울이었다.


겨울은 겨울이다. 어제 저녁부터 내린 눈이 빌딩 숲 사이로 휘몰아쳐 항상 나를 어김없이 휘돌아 나간다. 어찌나 세상이 새하얀지. 사람들이 모두 진눈깨비처럼 보인다. 사람들의 마음도 계절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걸까? 난 아직 붉은 색인데. 세상은 온통 하얀색뿐이다.


따르릉. 따르릉. 많지는 않지만 가끔씩 한 달에 두세 번 울리는 전화벨이다. 시골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나 엄마일거다. 고향. 부모님이 사시는 곳. 언제나 마음은 그곳을 향하지만 몸은 항상 멀리 가있다. 조그마한 간판들이 띄엄띄엄 있는 읍내에서 우리 마을까지는 10리길이 조금 넘는다.


그것도 신작로 비포장도로로 10리를 가야 한다. 그리고 약간은 높고 구불구불한 신작로를 따라가서 꽤나 높은 고개를 하나 넘으면 세 개의 마을이 옹기종기 반상회 하듯이 모여 하나의 리(里)를 만들고 있다.


한 동네에 30여 가구가 모여 사는데, 언제부턴가 집 수보다 사람 수가 더 적은 마을이 되었다. 읍내에서 우리 마을 가는 버스는 하루에 네 번뿐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항상 네 번뿐이었다. 오전 7시, 11시, 그리고 오후 3시, 7시. 그래서 우리 마을을 읍내 사람들은 산중이라고 부른다.


군대 다녀와서 처음으로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 전에는 아빠였는데, 그때 어찌나 쑥스럽던지.
“나다.”
“예”
“거기도 눈 많이 왔냐?”
“좀 많이 왔네요.”
“그래 오늘이 할머니 제사인 줄은 알고 있냐.”
“네. 그래서 이따가 내려 갈려고요.”
“눈도 많이 오는데, 오지 말아라.”
“차도 안 다니더라.”
“봐서요, 아버지.”
“그래. 들어가라.”
“예.”


오늘도 변함없이 아버지와의 통화는 항상 이렇다. 언제나 자기 할 말만 하시고는 끊어 버리시지. 그래서 아버지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생각해 보면 아버지하고는 이야기를 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다만 명령을 내리고 나는 따를 뿐이었다.


항상 이렇게 해야 한다. 이건 이렇게 하는 거란다. 이건 이런 거란다. 이것 좀 해라. 등등 ‘오늘은 조금 있으면 중요한 시험도 있고 한데, 그냥 집에 있을까? 그러나 저러나 세상이 눈 천지인데, 그 시골에 버스나 다닐지 모르겠네. 무슨 핑계 거리라도 없나 생각해 봐야겠다. 아니면 늦게 전화해서 눈이 와서 시골 가는 버스가 없네요 할까. 그럼 아버지가 서운해 하시겠지. 아니면 공부 한다고 그럴까? 아니면….’ 이런저런 핑계 거리가 생각이 나질 않는다.


할머니 기일은 집안사람들이 다 모이는데, 난 별로 집안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공부는 잘되가냐. 요즘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냐.” 등 대답할 것이 너무 많다.


항상 집안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말들이 많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좋아 하시는데, 난 아닌가 보다.


‘그래도 할머니 기일인데, 터미널까지는 갔다가 읍내 가는 버스 없다고 하면 그냥 와야지. 사실 5살 때 돌아가셔서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할머니지만 그래도 아버지 엄마잖아. 그래 많이 늦었지만 슬슬 내려가 볼까.’


주섬주섬 책 몇 권, 엄마가 주신 다 먹은 김치통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선다. 아직도 눈이 한창이다. 시내버스는 만나기 싫은 사람 만나러 가는 것처럼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일단 터미널에 가서 읍내 가는 버스 편을 알아 봐야겠다.


터미널에는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다. 간간이 보이는 사람들은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내느라 바쁘다. 무슨 일이 저리도 바쁜지 발걸음이 너무 빠르다.


“00읍 가는 버스 있어요?”
“네. 평소에는 많은데.” 오늘은 눈 때문에 거의 운행을 못 한단다.
“네 30분정도 기다리면 00읍 가는 버스 있어요.” 매표소 아가씨는 퉁명스럽게 말을 한다.
“30분 기다리죠. 00읍 학생 하나요.”
“네 2300원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래 일단 읍내까지 갔다가 동네 가는 버스 없으면 그냥 와야지.’


읍내 가는 버스는 사람이 만원이다. 아까 터미널에 있던 사람들이 다 탄 모양이다. 사람들이 많아 서서 가야하는 형편이지만, 그래도 색다른 고향 가는 길이다. 가는 길 온통 마을을 덮은 눈 사이로 집에서 저녁밥 하는 소리가 버스 안에서도 보인다. 하늘에 기둥을 길게 드리운 굴뚝들이 서로 누구 꼬랑지가 긴지 내기하는 것 같다.


3시간 만에 읍내에 도착했다. ‘버스 막차 시간은 이미 지나 갔고, 그래 온통 눈으로 세상이 덮여 있으니 참 깨끗해서 보기가 좋다. 이런 날 한번 걸어서 집에 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래 언제나 가는 길은 똑같다. 다만 가는 사람만이 다를 뿐인 것이다. 그 길에는 내가 걸었던 길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할아버지와 낚시하던 조그마한 둠벙도 있을 것이고, 할아버지가 나를 위해 장터에서 자전거를 사서 나를 태우고 넘던 고개도 있을 것이다. 저 고개는 항상 저기에 있었지만 난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언제나 그리워만 했고 언제나 마음속에 그림만 그렸던 그 곳. 그곳은 이곳에 이렇게 항상 있었다.


고개를 넘는 길은 산 굽이굽이마다 그냥 하얗다. 너무나 희고 너무나 깨끗해서 산이 산 같지 않고 뭉게뭉게 흰 구름 같다. 그 흔한 토끼 발자국도 없이 너무나 조용히 눈이 내린다. 산에서 들리는 소리도 하늘에서 들리던 소리도 아무것도 없이 눈만 내린다. 소나무는 눈을 머리에 너무 많이 이고 있어서 왠지 힘들어 보이기도 한다. 눈은 둠벙에 조용히 내리고, 둠벙에서 소리도 없이 사라진다.


눈 내리는 고개의 정상에서 마을을 내려다본다. 희미하게 보이는 마을이 가뭇하게 형체만 군데군데 보인다.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시골.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산중이라고 부르는 마을. 산으로 둘러싸여 바람도 그리 많이 불지 않고, 여름 햇볕의 따가움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고, 그저 조그마한 논밭대기 부치면서 사는 사람들. 누구의 말도 삼일이면 세 마을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런 세 마을 중에 한마을이 우리 마을이다.


윗마을은 차가운 물이 나오는 곳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따스한데 물만은 유독 차갑다. 앞마을은 햇볕을 등지고 사는 마을이다. 우리 마을은 나지막한 황토산을 머리에 이고 사는 마을이다.


멀리 우리 마을이 눈에 쌓여 사람들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간간히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고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소복이도 오고 있다. 이정도 눈이면 하루에 4번 다니는 버스는 3일 정도 운행을 못할 것 같다. 눈밭에 내 발자국을 남기고 뚜벅 뚜벅 걷는 발에 감각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 구불구불한 신작로 길을 따라 가는 고향 길은 하얀색 물감으로만 색칠한 흰 도화지에 나만 검은 점으로 찍혀 있다는 느낌이다.


멀리 고향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홉 번쯤 구불구불한 신작로를 따라가면 큰 느티나무가 보일 거다. 거기가 내가 태어나고 내가 숨 쉬던 곳이다. 언제부터인지 고향이라고 불리게 된 곳.


어느새 눈은 그치고 달빛은 푸르게도 밝다. 눈이 달빛을 받아 더 하얗게 빛을 발한다. 내가 걸어온 발자국도 이제는 선명하고, 뒤로 걸어보아도 발자국은 앞으로만 찍힌다. 뛰어도 보고 걸어도 본다. 눈밭에 누워서 하늘을 본다. 별은 쏟아지고 달은 여전히 푸르게도 밝다. 많은 기억들이 눈밭에 누워서 찍힌 내 모습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기억은 추억이다. 추억은 살아가는 동안 조그만 삶의 위로가 되곤 한다. 기억의 낙인은 절대 지워지지 않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삶의 이유가 될 때도 있다. 고향 마을도 이제는 선명하게 보인다. 눈에 덮여서 어깨가 무거워 보이는 마을 앞 느티나무도 이제는 선명하게 보인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심으신 나무란다.


그런데. 저 멀리서.


마을에서부터 신작로를 따라 눈을 쓸면서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흐리게 보인다. 누구일까?


이렇게 늦은 밤에, 차도 다니지 않은 눈 오는 밤에. 그것도 집 앞이 아니라 신작로를 쓸면서 계속 온다. 눈사람처럼 온 몸에 눈이 쌓여 있다. 누구일까?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은
아. 버. 지.
가슴이 답답하지만 일단 뛰어가 본다. ‘지금 뭐하시는 거지?’
“아버지 뭐 하세요”
“응 오냐”
“네”
“지금 여기까지 눈을 쓸면서 오신 거예요.”
“응”
“뭐하러 고생하세요.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데.”
“그냥 혹시나 해서야.”
“…. 빗자루 이리 주세요.”


나는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눈을 쓸고 아버지는 내 뒤를 따른다. 아버지가 쓸고 오신 눈길을 똑같이 쓸면서 집으로 향해 간다. 말은 없다. 세상이 너무도 조용하다. 세상에 나와 아버지만 있는 것 같다. 힘든지도 모르겠다. 그냥 말없이 빗자루로 눈을 쓸면서 간다. 마을 앞 느티나무가 나를 반겨준다. 어깨에 쌓인 눈이 많이 무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아버지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세요. 못 올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눈까지 오는데.”
“그냥 혹시 해서 나가보니 눈이 많이도 왔더라.”
“혹시 너 올지도 모르고 해서.”
“…. 그래도요”


느티나무 아래서 잠시 하늘을 본다. 하늘이 푸르고도 푸른 바다다. 끝도 없이 끝도 없이 나를 감싸는 바다다. 끝도 없고 깊이도 넓이도 알 수 없는 끝없는 바다다.


나도 이제 점점 바다가 되어간다. 아니 아버지만큼 너른 바다가 되고 싶다. 얼마나 넓은 바다가 될는지. 얼마나 깊고 큰 바다가 될는지. 아직은 모르겠고 조금은 걱정이다. 아직 나는 나의 아버지처럼 다 크지 못해 오늘도 부끄럽게도 나의 조그마한 바다를 점점 키워가는 즐거움만 알아 간다.


박종우
‘시와 커피’를 사랑하는 세종시민 입니다.


*독자 참여를 기다립니다.
시와 수필, 사진, 그림 등 지면에 담을 수 있는 어떤 장르도 좋습니다. 주변 이웃들과 문화적 감수성을 나누고자 하는 시민들을 위해 지면을 비워두겠습니다. 이메일을 보내 주세요.

한지혜 기자 wisdom@sj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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