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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위기와 '뻔뻔한' 문화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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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위기와 '뻔뻔한' 문화현상
  • 이충건
  • 승인 2016.01.2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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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물탐구 | 맥키스오페라단 단장 소프라노 정진옥


‘눈 뜨고 나니 스타가 됐다’고들 한다. 하지만 스타는 밤사이 뚝딱 만들어지지 않는다. 엔터테인먼트사의 기획력과 막대한 투자, 혹독한 연습생 시기를 거쳐야만 스타 하나가 만들어진다. 걸 그룹 이야기기만은 아니다. 우리지역의 가장 핫한 아이콘, 바로 소프라노 정진옥(46)이다.


정진옥은 소주회사 맥키스컴퍼니가 후원하는 맥키스오페라단 단장이다. ‘뻔뻔한 클래식’이 대전의 문화브랜드가 되다시피 하면서 맥키스컴퍼니의 공식모델까지 됐다. 20대 여배우나 가수를 모델로 쓰는 게 소주회사의 시류인데 이 회사는 이걸 뒤집었다. 40대 주부인 그를 발탁해 소주병 후면 라벨에 ‘뻔뻔하게’ 붙여 놨다. 그도 그럴 것이 정진옥은 대중에게 ‘3되지’로 통한다. ‘3되지’는 ‘얼굴 되지’ ‘몸매 되지’ ‘노래 되지’를 뜻한다.


맥키스컴퍼니는 여배우 모델료나 광고비, 마케팅비를 쓰는 대신 문화와 가치를 판다. 이딴 걸 팔아서 회사 매출이 과거에 비해 높아졌다는 객관적 자료는 없다. 그래도 꿋꿋이 맥키스오페라를 앞세워 ‘뻔뻔한 클래식’ 정기공연과 찾아가는 공연을 일 년에 130~140회씩 연다. 벌써 5년째다. 세종시에서도 해마다 공연을 펼친다. 지난 12일 신년음악회에도 세종시민들이 시청 대강당을 계단까지 빽빽하게 채웠다.


클래식의 수준을 떨어뜨렸다는 정통음악계 일각의 날선 비판에도 불구하고 ‘뻔뻔한 클래식’은 지역문화계의 아이콘이 됐다. 누가 뭐래도 지역 대표 브랜드 중 하나다. 정작 이를 폄훼하는 음대에선 클래식전공이 사라지거나 뮤지컬과 대중음악으로 대체되고 있다. ‘고전’의 위기다. 역설적이게도 대중은 ‘뻔뻔한 클래식’에서 ‘고전’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뻔뻔한’ 문화현상의 실체에 대해 내린 결론이 바로 그것이다.


시련 1 - 꿈을 가슴에 묻다


정진옥은 1969년 대전 선화동에서 1남 4녀의 넷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동아콩쿠르에 나가 1등상을 받았다. 노래 잘 한다는 소리를 하도 들어서 성악가 꿈을 일찍부터 꿨다.


하지만 아버지 봉급으로 5남매를 공부시키기엔 벅찼다. 언니가 이화여대, 오빠가 충남대 의대를 다니던 터라 그는 대전지역 대학에 장학생으로 가야할 처지였다. 한 대학 콩쿠르에서 우승을 해 장학증서를 받아놓은 상태였던 것. 그는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자식들 공부는 하고 싶은 대로 시키겠다는 어머니의 고집 덕택에 그는 이화여대 성악과에 갔다. 대학에서도 실기성적은 최상위 권이었다. 다음 코스는 이태리 유학.


아르바이트로 아이들 가르치며 모은 돈으로 로마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부풀었던 꿈은 거기까지였다.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신 게 그 즈음이다. 한 달에 70~80만원이면 하고 싶었던 공부 원대로 했을 텐데, 동생 대학등록금까지 부담해야 할 가정형편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페루자의 1년 코스 아카데미 졸업연주회가 이태리 유학의 끝이었다.


시련 2 무대를 그리워하다


귀국해서는 오빠 친구와 결혼했다. 남편은 재활의학과 전문의다. 딸 아들 하나씩 낳고 살림을 하면서도 어릴 적부터 키워온 꿈이 아른거렸다. 결혼 후 3년여가 흐른 뒤부터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다시 몇 년 뒤에는 충남대 대학원에도 입학했다.


지역에서 대학원 다니면 무대에 설 줄 알았다. 하지만 대전에서는 그에게 허락된 무대는 없었다. 유학파도, 지역 음대출신도 아닌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출신대학별로 나뉘어 쌓아놓은 사람의 벽은 견고했다. 정작 꿈에 그리던 무대에는 못 오르고 연습하는 시간만 길어졌다. 그는 노래를 할 수 있다면 무대의 대소경중(大小輕重)을 가리지 않았다. 자신을 좋아해주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노래를 불렀다. 어느새 그에게는 꼬리표가 붙었다. ‘행사 전문 소프라노.’


‘마음껏 비웃어라.’ 그는 채우고 또 채우려했다. 돈 봉투를 들고 안 만난 선생님이 없을 정도로 찾아다녔다. 5000원 짜리 티셔츠를 사 입어도 레슨비는 아끼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안타까웠는지 공군군악대 협연하면서 알게 된 한 후배가 안형일(88) 교수를 소개해줬다. 국립오페라단 단장을 지낸 서울대 명예교수다.
노(老)교수는 그의 노래를 듣더니 필(feel)도 좋고 소리도 좋다고 치켜세웠다. 그는 3년간 서울을 오가며 ‘대한민국 최고 테너’에게 레슨을 받았다. 자신의 제자들인 박미애나승서박성원 등 쟁쟁한 연주자들과 그를 서울예당 한 무대에도 세웠다. “너는 무대에 설 좋은 조건을 다 갖추고 있어.” 선생은 연신 잘 했다며 제자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서울예당에서 쟁쟁한 성악가들과 연주회를 하면서 용기를 얻었는데 대전에서는 행사 같은 작은 무대나 서는 소프라노 대접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깨달았죠. 어떤 무대든 내 노래를 행복하게 들어주는 관객이 있으면 값진 무대라는 걸. 철저하게 대중 중심적인 음악을 하게 된 것도 이런 경험과 시간이 준 영향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기회는 찾는 자에게 주어진다


그런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을 무렵이다. ‘클래식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평소 연주회를 함께 하며 친분을 쌓은 동료에게 전화를 했다. ‘즐거운 클래식’을 해보자고. 그에게 되돌아온 반응은 이랬다. ‘내가 충분히 노래로 감동을 줄 수 있는데 왜 춤을 추고 웃겨야 하느냐.’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무대가 없어 무대를 그리워하던 사람들이 하나씩 한 뜻으로 모여들었다. ‘유쾌한 클래식 퍼니퍼니(funny funny)’가 탄생한 것이다. 궁즉통(窮則通), 궁하면 통한다는 말은 옳았다.


이제는 어디에서 연주를 하느냐가 문제였다. 아이들이 클래식을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팀인데, 정작 수요가 없었다. 오라는 데가 없어서 목사님에게 얘기했더니 교회가 주최하는 음악회에 초청을 해줬다.


맥키스컴퍼니 조웅래(56) 회장을 만난 건 페이스북이었다. 그도, 조 회장도 페북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친구요청을 주고 받으면서 음악회에 올 수 있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조 회장은 다른 약속이 있다며 장소와 시간만 알려달라고 했다. 음악회에는 회사 임직원들이 다녀갔다. 그들은 휴대폰으로 공연 동영상을 찍어 조 회장에게 보여줬다. 사실 조 회장은 계족산 황톳길에서 만 4년 간 이어온 정기공연의 새 팀을 물색 중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영상을 본 조 회장이 무릎을 탁 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퍼니한 클래식이 소주랑 콘셉트가 딱 이네.”


설마 했는데 공연을 산에서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 회장은 한 발 더 나아가 매주 토, 일요일 주말마다 하자고 했다. 팀 이름도 자기 맘대로 ‘뻔뻔한’으로 바꿨다. 그래야 ‘브랜드’가 된다면서. 매년 4월 둘째 주부터 10월말까지 펼쳐지는 ‘뻔뻔한 클래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와 같은 이유로, 무대가 없어 무대를 그리워만 했던 음악가들이 항상 그들만을 기다리는 무대를 얻게 됐다. 맥키스오페라 단원은 모두 8명이다. 소프라노인 그가 단장이고 테너 장경환 구병래 박영범, 바리톤 이병민 고성현 박민성, 피아니스트 박혁숙.


‘정통’ 놀라자 빠지게 만든 대전예당 매진


‘뻔뻔한 클래식’에 대중은 환호했다. 그래도 ‘정통’ 음악계의 따가운 시선은 여전했다. ‘춤추고 웃기면서 왜 클래식을 코미디로 만드느냐’는 것. 그런 비아냥거림을 뒤로 하고 이들이 대전 최고의 극장에 섰다. 지난해 3월 22일 대전예당 아 트홀에서다. 7만원, 5만원 표를 팔았는데 공연 2주일 전에 하루 2회 공연이 전석 매진됐다. ‘정통’이 아니라고 폄하하던 ‘정통’이 놀라자빠질 사건이었다. ‘뻔뻔한’ 문화는 단순히 산이나 거리만의 현상이 아니었다는 걸 대중이 입증한 셈이다.


‘뻔뻔한 클래식’이라고 해서 웃기지만은 않다. 웃기면서 음악적인 감동을 준다. 기뻤다가 슬퍼하면서 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레퍼토리를 구성했다. 여러 차례 곡을 빼고 추가하면서 사람들 귀에 가장 익숙한, 한정된 노래들로 완성한 게 최근의 프로그램이다.


‘뻔뻔한 클래식’은 계족산에서 매년 4월 둘째 주부터 10월말까지 토, 일요일 공연을 펼친다. 이게 다가 아니다. ‘찾아다니는 음악회’란 이름으로 학교며 관공서 등에서 시민들을 만난다. 1~2월은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금, 토요일마다 대전 중앙로 지하상가를 찾는다.


대중이 스스로 ‘고전’ 읽도록 만들다


이 과정에서 의미 있는 현상이 발견됐다. 학생들이며 시민들이 콘서트를 보고난 뒤 자신이 보고 들은 곡이 어떤 곡인지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찾아내더라는 것. 두 번, 세 번 공연을 관람한 관객은 박영범이 부르는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 도니체티가 쓴 희극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서 네모리노가 부르는 아리아란 것쯤은 다 안다. 나는 클래식의 대중화에 이 팀처럼 혁혁하게 기여한 예술단체를 만나보지 못했다. ‘고전’의 위기 속에서 대중이 스스로 ‘고전’을 읽도록 만든 힘, 그것이 ‘뻔뻔한’ 문화현상의 실체다.


그는 지난해 캄보디아에서 오지 아이들에게 음악을 들려준 일이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다고 말한다. 전기가 안 들어와 발전기 하나로 전기를 만들고, 또 다른 발전기로 음향을 설치해야 하는 악조건이었다. 가이드는 이 마을이 문화란 걸 접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펑펑 울었다. “클래식을 들어본 적 없는 아이들이었어요. 그 아이들의 눈빛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아마 평생 못 잊을 거예요. 하늘의 별처럼 초롱초롱한 그 눈빛을….” 우리는 그 눈빛을 안다. 사람의 눈은 공감해야만 반짝일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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