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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비극, 끝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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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비극, 끝은 있을까
  • 세종포스트
  • 승인 2014.12.1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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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모든 빛깔들의 밤’

기차사고로 아이 잃은 부부
스스로 죄책감의 수렁 빠져
남은 것은 산 자들의 파멸

세월호 참사 때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가장 먼저 화살을 돌린 건 자기 자신이었다. 아이를 하필 그 학교에 보낸 자신을, 정부에 항의할 만큼 유력하지 못한 자신을, 브랜드 옷을 못 사줘 사망자 인상착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만든 자신을 탓하며 가슴을 쳤다. 감당할 수 없는 비극 앞에 응보의 대상을 찾지 못할 때, 인간은 가장 빠르게 주저 없이 찌를 수 있는 대상으로 자신을 발견한다. 소설가 김인숙의 장편 <모든 빛깔들의 밤>(문학동네)에는 밤처럼 시커먼 재앙이 지나간 자리에 거미줄처럼 얽혀 자라나는 여러 빛깔들의 죄책감이 그려진다.


희중과 조안은 부부다. 희중은 아버지가 없고 조안은 어머니가 없지만 그건 둘 사이를 더 강하게 묶는 끈이 되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외롭게 산 희중의 어머니는 자신을 “엄마”라 부르는 조안 앞에서 대놓고 기쁨을 표현하지도 못할 만큼 좋아했다. 조안의 동생 상윤은 어머니가 죽은 후 건달로 살지만 희중은 그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친동생처럼 보살핀다. 그리고 팔 개월 된 아기, 달콤한 젖내를 피워 올리는 아기는 부부의 애정과 신뢰를 증거하고 약속하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조안과 아기가 탄 기차가 전복하고 아기가 즉사하면서 가족을 묶어주던 끈은 자신과 타인의 목을 조르는 끈으로 바뀐다.


“당신, 나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이사를 가자는 희중의 말에 별 반응이 없던 조안은 이사 전날 5층 베란다 창틀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아 희중을 쳐다본다. “당신이 아니라 나라고 말하고 싶은 거잖아? 그렇잖아. 내가 아니야. 그건, 당신이야.” 사고 당시 조안은 불타는 차 내에서 아기를 창밖으로 던졌다. 잘못된 판단으로 아이를 죽였다는 가책은 조안의 머릿속을 단 하나의 생각으로 채운다. 자신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남편이 침묵으로 자신을 벌하고 있다는 확신. 조안은 5층에서 뛰어내린다.


희중은 사랑하는 아내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에 만족하려고 하지만 조안의 투신은 그를 극도의 불안 상태에 빠뜨린다. 조안은 관목 위에 떨어져 목숨을 건지지만 이번에는 위층 남자가 희중의 평온을 방해한다. “애가 너무 웁니다.” 백곰처럼 거대한 남자는 애 우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다며 항의한다. “애, 없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던 희중은 자신이 뱉은 소리에 가슴이 무너진다. 그날 밤 희중은 문득 죽은 아버지의 울던 모습을 떠올린다. 희중이 열두 살 되던 여름 방학 때 산에서 추락사한 아버지.


그 해 여름, 아버지가 교사로 있던 학교 창고에서 어린 여자애의 시체가 발견됐다. 어쩐지 신이 난 희중은 친구들에게 살인 사건 이야기를 부풀려 늘어놓기 시작했고, 허풍은 아버지의 옷에서 핏자국을 봤다는 데까지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경찰 조사를 받았고 얼마 후 산에서 죽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누명을 썼고 사고로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희중은 여자아이의 머리핀을 본 것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비로소 희중은 자신이 추악한 피를 물려받았을까 봐 내내 두려워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게 자신의 더러운 피 때문이 아니라 사고 때문이라는 사실에 혹시 안도하지는 않았단 말인가. 아이를 기차 창밖으로 집어 던진 것이 자신이 아니라 조안이라는 사실에, 또 안도하지는 않았단 말인가.”


생을 뒤덮은 비극은 점점 더 몸집을 키워 현재를 마비시키고 미래를 삭제하는 것도 모자라 과거까지 불러낸다. 그러나 인과는 결국 규명되지 않고 남는 것은 산 자들, 죽음을 목격한 이들의 파멸이다. “그 모든 것은, 생의 어느 한 순간에 시작되는 불행은, 단지 모두 다 우연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우연은 어떻게 끝을 맺어야 한다는 말인가.”


<제휴기사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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