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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상상력 속 인류학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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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상상력 속 인류학적 고찰
  • 김재중 기자
  • 승인 2014.12.08 1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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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백인 인디언 엔젤’

‘라가치상’ 두 번 받은 프랑스 작가 소설
사실주의 바탕에 둬 더 강력해진 판타지


놀라운 상상력이다. 마치 바다 건너편 어딘가에 있을 법한 세상의 이야기다. <백인 인디언 엔젤>은 어린이도서 분야의 노벨상 격인 라가치상을 두 차례나 받은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플라스(Franois Place, 57)의 새 소설이다.


가장 강력한 판타지는 가장 사실적인 묘사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오르배 섬 사람들이 만든 지도책>(1996-2000, 전3권)과 <오르배 섬의 비밀>(2011)에서 그랬던 것처럼 플라스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판타지를 만들어냈다. 이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메리카, 심지어는 극지방까지 전 세계를 여행하고 기록한 내용이 상상력의 원천이 됐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에서 우리는 ‘빛의 세기’, 18세기 유럽 계몽주의 시대와 마주한다. 사전적으로 계몽이란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친다는 뜻이다. 유럽인들에게 있어 문명화된 사회는 오직 유럽일 뿐이었다. 문명의 대치점은 미개와 야만이다. 계몽주의는 문명화된 ‘시민사회’가 야만사회를 구원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의 바탕이 됐다. 18세기 소설은 항해술의 발달과 함께 미지의 세계, 즉 미개한 야만사회에 대한 모험담이 주류를 이뤘다. 대표적인 작품이 영국작가 대니얼 디포(Daniel Defoe)의 <로빈슨 크루소>(1719)다.


로빈슨 크루소가 누구인가. 요크 태생으로 항해에 나섰다가 난파되어 창의와 연구, 근면과 노력으로 무인도에 문명을 건설한 문명화된 유럽 시민이다. 무인도에 상륙한 식인종의 포로 프라이데이를 구출해 노예로 삼기도 한다. 프라이데이란 이름은 그를 만난 날이 금요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원주민들에게 이런 식의 이름을 지어줬다. 야만인 프라이데이를 대하는 로빈슨 크루소의 모습은 마치 창조자 하느님을 연상시킨다. 이런 종류의 소설이 얼마나 많은지 18세기 모험소설의 비블리오그래피(bibliography)는 셀 수 없을 정도다.


프랑스 현대소설작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는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1967년)을 통해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비판적 시각으로 다시 써내려갔다. 소설은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문명화된 사회가 바라보는 야만의 세계가 아니라, 원시성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오마주(hommage)다. 따라서 <방드르디>는 <로빈슨 크루소>와 가장 닮았지만 가장 다른 소설이다. 가령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 문명을 건설하려는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스스로 깨닫는다. 더구나 불쑥 나타난 방드르디(불어로 프라이데이)가 로빈슨 크루소가 건설하는 문명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새로 쓰인 <로빈슨 크루소>에서는 문명사회의 시민인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라 야만인 방드르디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투르니에적 사유에서는 문명이 문명화시킬 대상, 즉 야만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원시상태의 자연에 문명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야기한다.


프랑수아 플라스는 18세기 모험담을 투르니에적 사유로 작품에 녹여내는 작가다.


<백인 인디언 엔젤>에서 독자는 타임머신을 타고 18세기 신대륙 탐험 길에 오른다. 메스티소(mestizo, 인디언과 백인의 혼혈)인 프랑스계 인디언 엔젤은 노예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출발한 루이15세의 범선 넵튠 호에 몰래 승선한다. 넵튠 호 선원들과 얼떨결에 일원이 된 엔젤은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끝,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곳에 우연히 다다른다. ‘입이 두 개 달린 괴물’들이 사는 그런 곳이다. 일행에서 벗어난 엔젤과 베네치아의 귀족 코르바도로는 이들 오아노아족의 포로가 되어 그들의 사냥, 종교, 삶의 방식 등을 배워나간다. 이들이 배우면서 독자들에게 전하는 오아노아의 풍습은 서사적이면서 동시에 서정적인 한 편의 다큐멘터리다. 판타지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남극 대륙의 숲과 새, 꽃, 해양 동물, 그리고 두 개의 목소리를 가진 부족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강력한 사실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럼버스가 자신이 발견한 땅을 인도로 믿었던 것처럼 넵튠호의 과시욕 강한 두 학자는 오아노아를 ‘사라진 아틀란티스 후예들의 땅’으로 둔갑시킨다. 앞으로 남은 일은 이 땅에 문명을 건설하는 일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땅을 다시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오아노아에 대한 정보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곳으로 가는 지도는 그 지역에서만 자라는 바다 꽃을 불에 태워야만 볼 수 있어서다. 따라서 소설의 종착지는 백인 인디언 엔젤의 운명, 그 자체다. 문명과 야만의 중간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발견해 가는. 이 같은 결론에 코르바도로가 화답한다. 그 결론은 지극히 인류학적인 고찰이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믿는 삶의 방식, 그것과 다른 방식도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그런데 상상력은 인류학적 고찰의 가장 큰 원동력이다. “미지의 세계는 미지 그대로 남겨두는 게 좋다”는 코로바도르의 말처럼 플라스에게 있어 상상력은 현실이란 천을 한 올 한 올 짜고 있는 실이기 때문이다.


김재중 기자 jjkim@sj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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