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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레지스탕스’의 지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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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레지스탕스’의 지적 성찰
  • 세종포스트
  • 승인 2014.11.28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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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인간의 문제’

공쿠르 상 두 번 받은 작가의 첫 산문집
정치논쟁과 평생 탐닉한 여성성 등 다뤄


<인간의 문제>는 로맹 가리(1914~1980)가 첫 번째 공쿠르상 수상작 <하늘의 뿌리>를 썼던 1957년부터 66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여러 언론 매체에 실었던 글과 대담을 묶은 책이다.

그는 “여러 편의 소설을 동시에” 쓰고 “스스로가 악덕 기업주처럼 느껴져 글 쓰기를 금했을” 정도로 쓰기에 중독된 왕성한 필력의 작가였지만 ―소설만 40여 편 펴냈고 영화도 만들었다― 허구가 아닌 그 자신의 내면을 고스란히 노출한 산문집은 2005년 출간된 이 책이 처음이었다.

책을 엮은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가 서문에 밝혔듯 “출간 연도순에 따라 배열된 글들은 마치 우연처럼 가리 사상의 내면적 발전의 생동감을 보여”주며 “영원한 레지스탕스 로맹 가리의 육성을 들려준다.” 그 육성은 열정적이고 공격적이며 종종 난폭하고 분노에 차 있지만 진솔함과 유머, 통찰과 박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인본주의에 대한 희망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드라마보다 극적인 그의 삶의 이력을 또다시 간추리는 것은 번잡한 반복이 될 테지만 러시아와 폴란드, 프랑스, 미국을 차례대로 생의 근거지로 삼으며 각각의 문화를 흡입해온 주유의 삶, 공군 조종사로 2차 세계대전에서 세운 공훈과 이후 외교관으로서의 승승장구, 24세 연하의 아름다운 여배우 진 세버그와의 결혼과 이혼, 1년 상간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자살 등은 이 책을 읽기 위한 필수적인 사전 정보다. 자유주의자로서의 정치적 입장과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두 번째 공쿠르상을 거머쥐며 평단을 조롱했던 비평계와의 오랜 갈등 또한 염두에 둬야 대담자와 거친 언어로 치고받는 그의 내면을 조망할 수 있다.

책은 크게 식민주의와 민주주의, 나치즘과 공산주의,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 등에 대한 정치적 입장 표명과 논쟁, 작품에 대한 해석과 비판에 대한 반론, 세계대전 이후 창궐한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 대한 개탄과 대안 제시 등의 정치ㆍ사회 평론의 성격을 띤 것들과 그 자신 평생의 문학적·생애적 주제로 인정한 여성성과 여성에 대한 탐구를 다룬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주제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반대한다”는 알베르 카뮈의 말이다. 책에 수차례 반복해 등장하며 “이 세기의 가장 아름답고 진실된 표현”으로 숭앙받는 문장이다. 가리는 “모든 체제는 오류에 대한 보장을 해야만 하고, 모든 이데올로기가 진리와 오류 사이의 유혈 낭자한 투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도피처로 인간이 피할 수 있도록 망명지가 되어야만 하는 여분을 존중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식민주의는 “한때는 설명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시효가 지난 사회적 형식으로 판단해야” 하고, “민주주의는 진리를 되 뱉어낼 수 있는 권리”로 옹호돼야만 한다.

포르노와 난잡한 성 문화의 범람, 약물 중독, 폭력 등 소비사회의 병폐에 대해 진단한 글들도 여럿이다. 가리가 보기에 이것은 인간 풍속의 타락이라기보다는 “확실성의 영역이 나날이 줄어드는 사회에서 그것을 넓히기 위한 것을 노리는 비뚤어진 의지를 드러내는 징후”다. 소비사회가 끊임없이 가하는 자극들은 “미래라고 해봐야 고작 최저임금 수준에 맴돌 뿐인 젊은이들에게 욕구불만, 결핍, 항구적 박탈 상태를 유발하고 그 상태에 머물게” 하며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은 그 과시된 행복이 초래한, 결핍과 박탈을 해소하고자 하는 비뚤어진 욕망의 비극적 결과였다.

말년의 그가 유일한 ‘문화’라고 강조한 ‘여성성’은 그가 평생토록 탐닉한 주제였다. 자기 안의 여성성과 접속하기 위해 늘 여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것이 편했다는 가리는 그러나 여성 숭배의 방식에 있어서는 보수적이었다. 그는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거칠고 소략한 남녀평등의 개념은 정신분석에서 밝힌 것보다 훨씬 많은 동성애, 불감증, 성 불능을 유발하는 어리석은 짓 가운데 하나”라며 아내는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자신의 귀중한 매력을 발산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여신의 삶인데, 페미니즘은 여신들을 인간 세계의 남성 종자들처럼 이 땅으로 끌어내리려 한다는 비난이다.

여성성의 옹호가 살아오면서 했던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했던 가리는 “공감, 부드러움, 사랑”을 원했다. 전장에서조차 죽음에 돌격하며 흥분했던 이 남성성의 현신이 약자들과 접속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여러 혈통이 섞인 이민자 신분 때문만이 아니라 그토록 갈구했던 여성성 덕분이기도 했을 것이다. 1957년의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한 인간의 음성에서 증오에 찬 고통의 어조를 감지하게 되면 나는 공감과 희열을 느끼며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형제니까요.”

<제휴기사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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