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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날들을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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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날들을 회상하며
  • 이환태 교수(목원대 영어영문학과)
  • 승인 2014.11.22 15: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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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태의 문학산책 | 윌라 캐더의 ‘나의 안토니아’

추억의 여인 다시 찾기까지 20년이란 세월 걸려
작가의 말처럼 “좋은 날들은 제일 먼저 떠나가”
겨울밤, 아름다웠던 날 생각하며 읽기 좋은 소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어온다. 들판을 누렇게 물들이고 있던 벼를 수확하고 나면 세상은 점점 더 쓸쓸해진다. 수십 년 전만 해도, 가을걷이가 끝난 후 사람들이 가장 서둘러 하던 것이 땔감 준비하는 것이었다. 찬바람 불 때마다 우수수 쏟아지는 낙엽, 그걸 알뜰히 긁어다가 차곡차곡 쌓아두면 아주 요긴한 땔감이 되곤 했다. 식량과 땔감만 제대로 준비해 놓으면 며칠 씩 눈보라 치고 살을 에는 추위가 지속되어도 아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추운 겨울이야말로 정지된 시간 속에서 아늑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것은 제대로 된 집과 살림살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다. 낯선 이국땅에 막 이민 와서 입을 옷조차 변변하게 준비한 게 없는데,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벌판에 매서운 겨울이 닥쳐왔다면 어떨까? 재산을 톡톡 털어 산 집인데, 막상 와보니 그것이 동굴에 덧대어 지은 움막집일 때 그 절망감이 어땠을까? 윌라 캐더(Willa Cather)의 소설 <나의 안토니아(My Antonia)>에 나오는 여주인공 안토니아가 열네 살 때 이민 온 네브래스카의 집이 그랬다. 한 없이 너울지며 펼쳐지는 황량한 초원에 눈보라가 며칠 씩 모질게 불어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데,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은 언제 바닥을 드러낼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고작 이런 생활을 하기 위해 그 좋은 고향을 버리고 온 것인가? 가장인 쉬머다(Shimerda) 씨는 너무나 암담하여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어찌 보면 너무 무책임한 것 같지만, 그의 자살은 무심한 이웃들에게 자신의 가족을 제발 살려달라는 절규였다. ‘새로이 정착하느라 고생은 좀 하겠지’하고 생각들은 하면서도 선뜻 도움의 손길을 뻗지 못하고 있던 이웃들이 드디어 움직인다.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져오고, 눈을 치우고, 관을 짜고, 장례를 치러주며, 이듬해 봄에는 그들에게 통나무집까지 지어준다.

어른들의 고통과는 달리, 아이들은 온갖 생명들을 키워내는 그 들판을 마음껏 쏘다니며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는다. 버지니아에서 같은 해에 양친을 모두 잃고 조부모와 함께 살기 위해 쉬머다 가족과 같은 날에 그곳에 온 남 주인공 짐 버든(Jim Burden)이 처음 본 네브래스카의 초원은 마치 세상의 끝과 같은 절망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쉬머다 씨의 유언과 같은 부탁으로 여주인공 안토니아에게 영어를 가르치게 되면서 그녀와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은 그가 평생토록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 네브래스카의 초원과 그의 친구 안토니아는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언제나 그의 마음에 머무는 고향이자, 어머니이자, 아내이기를 바랐던 여인이며, 또 누이이기도 했다.

쉬머다 씨의 딸 안토니아는 짐 보다 네 살 위였다. 예쁘기도 했지만, 그녀는 무엇보다도 마음이 따스했고, 강인했으며, 폭발하는 생명력을 갖고 있었다. 짐은 읍내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는데, 어떤 여자도 안토니아처럼 그의 관심을 끌지는 못한다. 초원에서와는 달리 읍내에서의 단조로운 생활로 인해 삶의 목표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짐으로 하여금 대학을 갈 결심을 하게 한 것도, 읍내에서 제일 잘 사는 할링 씨보다도 더 부자가 될 사람이라고 말해주던 사람도 안토니아였다. 비록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지혜가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안토니아의 인생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짐이 대학에 가 있는 동안 그녀는 읍내에서 알게 된 도노반이란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덴버까지 갔지만 임신만 한 채 버림받는다. 언제나 안토니아의 소식을 물어 알고 있던 짐은 하버드로 대학을 옮기기 전에 잠깐 그녀를 방문한다. 그녀는 아무도 임신한 것을 모를 정도로 아이를 낳는 날까지 억척 같이 농사일만 하고 있었고, 그렇게 나은 아이를 아주 떳떳하게 키우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유명한 변호사가 되어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짐의 뇌리엔 여전히 안토니아와 네브래스카의 초원이 떠나지 않는다. 아니, 세월이 흐를수록 그것은 더 심해진다. 출장 차 안토니아의 고향인 보헤미아에 들렀을 때 그곳의 풍경을 담은 엽서를 그녀에게 보낸 적은 있었지만, 그가 일부러 그녀를 찾아갈 결심을 하는 데에는 이십 년이란 세월이 흐른다. 혹시 그녀가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예전의 그 모습과 다르면 어떨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십년 만에 만난 안토니아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보헤미아 사람과 결혼하여 자녀를 십여 명이나 두고 있었고, 삶으로부터 호되게 두들겨 맞기는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그녀가 낳은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볼 때 그녀가 한 종족을 탄생시키는 생명력 있는 여인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작가의 말처럼 “좋은 날들은 제일 먼저 떠나간다.” 찬바람 휭휭 부는 겨울밤에 그렇게 떠나간 아름다웠던 날들을 생각하며 읽기에 딱 좋은 소설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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