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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포스트
  • 승인 2014.11.14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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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

백민·개벽·사상계·선데이 서울 등 해방 후부터 2000년대까지
국내 잡지 126종 창간사 다루며 시대·문화·문학적 가치 탐색


“어떤 사람들은 오늘의 언론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상당히 제 구실을 한다고 평가한다. 이런 평가는 언론계의 내막을 모르는 순진한, 그리고 크게 잘못된 언론관이다.〔…〕 새로운 언론의 진정한 모습을 창출하기 위한 모임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오늘 보는 바와 같은 소책자 <말>을 내놓았다. 안팎의 제약으로 소책자 <말>의 보급은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 구절은 1985년 6월 15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 송건호 씨가 쓴 <말>의 창간사다. 유신정권 아래 동아일보 기자들이 무더기로 해직됐을 당시 편집국장이던 송 씨는 사표를 던지고 나와 <말>을 창간했다. 정권의 폭압에 대한 격렬한 투쟁, 잇따른 좌절이 창간 배경이 된 만큼 창간사 또한 비장하기 그지없다. 송 씨는 창간사에서 신군부가 만든 언론기본법의 폐지, 기관원의 신문사 출입 중지, 언론사와 타 기업의 경영적 유대 단절을 서슬 퍼런 어조로 주문한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는 고교 시절 <말>을 처음 읽은 경험을 이렇게 서술한다. “가슴이 ‘쿵쾅쿵쾅’거릴 수밖에 없었다. 신문, 방송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내용들이 보도돼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전두환의 입들이 운영하던 소위 ‘보도지침’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이 폭로로 세 명의 언론인이 국가보안법 위반 및 국가모독죄(!)로 구속됐다.”


잡지는 시대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신문보다 잡지가 시대의 거울로 꼽히는 이유는 창간에 들어가는 자본이 신문보다 적고, 불특정 다수가 아닌 특정 분야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며, 뜻이 통하는 소수가 모이면 바로 발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창간사는 발행인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려낼지에 대한 비전이 가장 의욕적이고 총체적으로 집약돼 있다는 점에서 독자적 가치를 지닌다. 천정환 교수가 국내 잡지들의 창간사만을 모은 책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을 펴낸 것도 창간사가 갖는 시대적, 문화적, 문학적 가치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책은 해방 이후부터 2000년대까지, 국내에서 발간된 잡지 126종의 창간사 123편을 다룬다. 해방이 되고 4개월 후 발간된 잡지 <백민>을 시작으로 <민성> <개벽> <사상> <현대문학> <씨알의 소리> <뿌리깊은 나무> <새마을> <문학과지성> <야담과 실화> <선데이 서울> <보물섬> <키노> <페이퍼> <월간잉여> 등 발행일도, 주제도, 분량도, 폐간 사유도 각기 다른 잡지들의 창간사를 시대별로 배열했다.


눈물과 피로 얼룩진 잡지 창간사들 사이에서 <선데이 서울>의 그것은 실로 눈에 띈다. 1970~80년대 대중오락지의 대명사인 <선데인 서울>은 창간사에서 잠시 긴장을 풀고 멋과 대화를 되찾자고 제안한다. “휴식 때나 저녁 밥상머리에서의 아기자기한 이야깃거리가 얼마나 아쉬운가.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상급자나 이웃의 흠잡기가 아니면, 연속극 줄거리 따위 라서야 그야말로 멋대가리 없는 일.〔…〕 독서의 계절을 맞아 첫 선을 보인 <선데이 서울>은 멋과 감미로운 화제의 샘이요, 주말의 벗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대적 배열이라는 단순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책을 쉽게 놓을 수 없는 것은 한국 현대문화사를 주시하는 저자의 집요함과 각 잡지와 인물들에 대한 주관적이고 신랄한 평가 때문이다. 천 교수는 1970년 발행된 <샘터>의 창간사를 ‘가장 유신스럽다’며, 암울한 정치 현실을 잊게 만드는 ‘마취제’라고 비판한다. <선데이 서울>이 주창하는 ‘4000만의 교양지’란 문구에 대해서는 “여배우의 수영복 사진이나 여성의 성감대 위치, 국내외 유명 스타들의 이런저런 스캔들, 유흥업소 탐방기들도 ‘교양’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면” 이 말이 성립할 것이라 조롱하기도 한다. <창작과비평>의 발행인 백낙청은 당대 한국 지식인 특유의 과도한 사명감 혹은 소부르주아의 명예욕에서 벗어난 품위 있는 지식인의 표상으로, <뿌리 깊은 나무>의 발행인 한창기는 남다른 심미안과 지식으로 한국 문화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전설의 인물로 기록한다. 잡지 창간사를 통해 본 한국현대문화사이자, 지난 시대와 인물들에 대한 쏠쏠한 뒷담화인 셈이다.

<제휴기사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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