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진정 슬픈 일, 꿈꾸지 않는다는 것
상태바
진정 슬픈 일, 꿈꾸지 않는다는 것
  • 남 청('철학 무게를 벗다' 저자, 전 배재대 심리철학
  • 승인 2014.11.03 13: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청의 인문학산책 | 인간에게 이상이 필요한 이유

쇼펜하우어 “욕망 성취 다음엔 권태 뒤따라”
성취 자체 아닌 어떤 욕망 바라느냐가 중요
불가능해보여도 참된 행복 주는 이상 가져야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세기적 염세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행복은 고통의 부재(不在)를 말한다. 행복은 구름 사이로 잠시 비치는 햇빛에 불과하다”라고 하며 이 세계를 본질적으로 고(苦)의 세계로 보았다.


그가 세계와 인생을 이렇게 비관적으로 본 것은 근본적으로 그의 인간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인간을 ‘맹목적인 욕망의 덩어리’로 본다. 그가 말한 ‘생(生)에의 의지’나 ‘생에 대한 본능적 충동’은 바로 이 맹목적인 욕망을 일컫는 말이다.


사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원초적인 욕망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식욕, 수면욕, 성욕, 명예욕, 성취욕, 권력욕, 소유욕 등 실로 인간은 무수한 욕망의 덩어리라 할 수 있다. 욕망 없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며 욕망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없다. 욕망은 인간의 삶을 이끌어가는 동인(動因)이라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욕망이 인간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본다. 욕망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 속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꿈틀거리며 이를 분출시키고 있으나 욕망의 성취는 언제나 한정되어 있다. 무한한 인간의 욕망 앞에 현실은 항상 충족될 수 없는 한계로 다가오기 때문에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언제나 고통으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욕망의 성취를 통해 인간은 결코 항구적인 행복도 안식도 얻을 수 없다. 욕망의 성취는 거지에게 던져 준 동냥과 같아 비참한 삶을 내일까지만 연장시켜 줄 뿐이다. 어떤 욕망이든 그것이 충족되고 나면 곧 또 다른 욕망이 나타나게 되고 이것은 무한히 계속된다.” 욕망이 성취되어도 그 만족은 내일까지 밖에 못 가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마치 거지가 동냥을 얻어 좋아하지만 그 만족은 잠깐이요, 내일이면 또 다른 동냥을 필요로 하듯 내일이면 또 다른 욕망이 고개를 내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욕망이 주는 또 하나의 고통이 있다. 그것은 욕망의 성취 다음에는 언제나 권태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욕망이 성취되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행복이 곧 권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물론 우리가 욕망을 성취했을 때 순간적인 행복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이지만 그것은 잠깐이요, 곧 권태가 뒤따른다. 예컨대 “저 사람하고 결혼만 할 수 있다면 원이 없을 텐데…”라고 생각하나 막상 결혼하고 나면 행복은 잠깐이요, 곧 권태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오래 전 어느 신문에 연세대학교 마광수 교수의 다음과 같은 칼럼이 실린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1980년대에 쓴 책들을 연대순으로 열거했다. 처음에 나온 책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수필집이고 그 다음이 <가자 장미여관으로>라는 시집이며 그 다음이 <권태>라는 장편소설이었다. 그는 이 세 권의 책 제목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고 그 제목이 주는 상징성에 대해 무서운 암시력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세 개의 제목들을 연결해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된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았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그런 여자와 함께 장미 여관에 가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막상 사랑을 나누고 보니 결국은 권태로웠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쇼펜하우어가 욕망의 성취는 행복이 아니라 권태라고 한 것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욕망이 충족되지 못함으로 인해 인간에게 내려지는 고통의 채찍이 면제되면 이번에는 욕망이 충족됨으로 인해 권태라는 또 다른 채찍이 떨어진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는 시계의 단진자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관심은 ‘욕망과 소망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라기보다는 ‘어떤 욕망, 어떤 소망을 바랄 것인가?’에 두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욕망과 소망을 성취하더라도 그로부터 참된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없다면 그러한 욕망과 소망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높은 이상을 설정하고 이에 도달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상이란 가장 높이 승화된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말한다. 그것을 얻자마자 곧 권태가 뒤따르는 그와 같은 저급한 욕망이 아니라 비록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을 성취하면 참된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높은 차원의 이상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이상이 설정되고 난 후라야 우리의 모든 삶의 모습과 방향이 분명한 윤곽을 갖게 될 것이고 동시에 저급한 욕망들로 인한 고통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올라가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현실과 동떨어진 허황된 꿈은 아예 갖지 말라는 교훈이 담긴 말이기는 하나 그렇게 긍정적인 말은 아니다. 도대체 쳐다보지 않은 나무를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는가? 쳐다보아야 한다. 쳐다보아야만 올라갈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찾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우리가 막연히 무지개 잡듯 이상을 꿈꾸어서는 안 되겠지만 현실에만 집착해 이상을 쉽게 포기하거나 아예 이상을 현실과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강철 왕’ 카네기는 그의 사무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한 폭의 낡은 그림을 평생 동안 붙여 놓았다. 그 그림은 유명한 화가가 그린 것도 아니고 무슨 골동품적인 가치가 있는 그림도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선생님께서는 왜 저 그림을 항상 저 곳에 붙여 놓고 계십니까?”라고 물으니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청년시절 세일즈맨을 하고 있을 때, 이집 저집 물건을 팔러 다니다가 한번은 어떤 노인이 살고 있는 집에 들렀지요. 그런데 그 집의 응접실에 이 그림이 붙어 있었어요. 넓은 바닷가 백사장에 낡아빠진 나룻배 한 척이 휑하니 그려져 있는 그런 그림이었지요. 때는 썰물 때여서 바닷물이 다 빠져나가고 나룻배는 백사장 모래 위에 얹혀 있고 노는 노대로 모래 위에 나 뒹굴어져 있어 보기에도 아주 황량하고 어쩌면 절망적인 무엇을 느끼게 하는 그런 그림이었지요. 그런데 그 그림 밑에 글씨가 씌어 있었는데 ‘반듯이 밀물 때가 온다’는 글이었어요. 그 그림을 보는 순간 그림과 그 밑의 글이 너무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어서 노인에게 부탁하기를 ‘어른께서 돌아가실 때 저 그림을 꼭 저에게 주십시오’라고 수차례 간청했습니다. 그 후 노인이 그때의 약속을 지켜 죽을 때 저 그림을 나에게 주었어요. 그때부터 나는 저 그림을 평생 동안 가까이 걸어 놓고 그때 얻은 교훈과 결심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지요.”


카네기의 인생 교훈이 담긴 이야기다. 꿈과 이상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에도 ‘반듯이 밀물 때가 온다’는 확신 속에 살아가는 자는 결코 염세주의에 빠질 수 없다. 그런 자에게는 인생에 대한 낙심과 좌절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며 더군다나 저급한 욕망들로 인한 고통이나 권태란 부적절한 말이다. 자신의 삶을 부정적으로, 비관적으로, 냉소적으로 보는 염세주의적 인생관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원대한 꿈과 이상을 갖는 일이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오르지 못할 나무라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대의 꿈이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슬퍼하지 마라. 진실로 슬퍼해야 할 것은 한 번도 꿈을 꿔 보지 않은 사람들이다”라는 말도 음미해볼 만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