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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추억이 되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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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추억이 되는 계절
  • 한동운 음악칼럼니스트(목원대 외래교수)
  • 승인 2014.10.27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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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운의 클래식노트 | 음악의 풍경, 가을

“바람·햇살·낙엽이 이끄는 데로
나를 세운 그 자리, 그 자리에
가을이 있어 나를 취하게 한다“


연이틀 비가 내린다. 가을비다. 가을비치곤 양도 많다. 가을비, 하루면 충분하건만 이틀은 좀 지루하다. 창 넘어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위태위태하다. 그 모습이 상념에 젖게 한다. 다채로운 가을 단풍의 향연은 가을이 주는 또 다른 즐거움. 그러나 우산들의 행렬은 혼란스럽고 우울하다. 그나마 비에 젖어 길 위에 달라붙어 있는 낙엽들이 연출하는 가을 길이 위안이 된다. 그 길 위를 거니는 행인의 발걸음은 사색적이다.


가을, 꽃들은 향기를 잊은 지 오래! 다만, 만개한 국화만이 가을 향을 드러낸다. 가을 들녘은 황금 자태를 자랑하고, 이른 가을걷이로 한가운데가 뻥 뚫린 논은 마치 맞추다가 만 퍼즐 같다. 밤나무 밤송이는 이미 누군가에게 털린 지 오래된 듯하다. 그래도 감나무에 달린 감들은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가을엔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했던가? 필자가 시인이 되어 본다. “바람이 이끄는 데로, 햇살이 이끄는 데로, 낙엽이 이끄는 데로, 시선이 이끄는 데로, 생각이 이끄는 데로, 추억이 이끄는 데로, 나를 세운 그 자리, 그 자리에 가을이 있어 나를 취하게 한다.” 이 시에 가을 산책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시에 곡을 써 볼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음악으로 담기엔 너무 볼품없다. 단조롭지만 그래도 ~데로, 각운(rhyme)이 좋다. 힙합으로 곡을 써야 할 것 같다.


아! 지금 필자의 옆자리에서 뒤늦게 시험 보는 제자들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애처로우면서 진풍경이다. 머리를 쥐어짜는가 하면, 연필 쥔 손가락을 풀기도 하고, 길게 내뿜는 한숨 소리는 심해의 깊이만큼 깊다. 누가 보면 집단 히스테리를 부리는 줄 알겠다. 잘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책상을 울리는 연필 소리만큼은 경쾌하게 들린다. 유리창에 흩뿌려진 빗방울을 보니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제자들의 마음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 학기 중간 평가는 비극적으로 가을 단풍의 절정과 함께 시작한다. 그래서 학생들에겐 단풍을 이야기하기엔 사치스러운 시기다. 학생들의 창백한 얼굴은 이미 을씨년스러운 겨울이다. 청춘, 가을을 즐기기엔 아직 이른 나이인가.


온종일 비가 오락가락한다. 창문 틈으로 빗소리가 들린다. 어디선가 많이 듣던 소리다. 내 귀엔 잘 달궈진 불판 위 김치전 익어가는 소리로 들린다. 그래서 비 오는 날에 부침개가 생각나나 보다. 빗소리가 정겹게 들리는 이유는 아직 남아 있는 나뭇잎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잎에서 만들어지는 소리는 여느 교향곡 못지않다.


어둠의 시간은 청아하고 맑게 빛나던 가을 풍경을 가둔다. 여름의 강렬했던 태양은 한낮을 더욱 길게 느끼게 하지만, 파스텔 색조의 가을빛은 어둠에 금세 물든다. 가을이 짧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 일게다. 아쉽지만 이게 가을이다. 가로등 조명 아래 단풍나무, 원두커피의 진한 향기처럼 어둠 속에서도 그 자태를 감출 수 없다. 가을이 담고 있는 모든 풍경이 음악이 되는 순간이다.


이제 음악을 소개할 차례다. 음악, 오늘은 소개할 음악이 없다. ‘가을’ 그 자체가 음악이니까! 사실, 가을엔 어떤 클래식 음악을 들어도 좋다.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리스트, 슈만, 멘델스존, 브람스, 말러, 드뷔시, 라벨, 라흐마니노프 등등 어떤 작곡가의 작품을 들어도 좋다. 가을 풍경이 그 음악들을 기억할 수 있는 추억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이를테면 음악이 가을 풍경이 되는 순간이다.


곧 풍성했던 나뭇가지가 앙상해지고, 비가 눈으로 바뀌는 그날이 오겠지, 그리고 그 나뭇가지에 흰 눈이 소복이 쌓이겠지.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들어야 할 음악이 많기 때문이다. 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낙엽 타는 소리, 감나무 꼭대기에 걸린 홍시 따는 소리, 해질녘 노을이 자아내는 탄성, 은행잎을 쓸어도 끝이 없다는 내 어머니의 푸념 소리와 졸업 연주를 앞둔 제자들의 악기 소리가 멈추는 그날, 가을 풍경 속의 음악은 멈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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