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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와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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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와 한국사회
  • 박권일 시사칼럼니스트(‘88만원 세대’ 공저자)
  • 승인 2014.09.29 1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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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 누가 불평등을 은폐시키나

방대한 데이터로 ‘낙수효과 재분배 이론’ 깨부숴 
보수진영 “아들뻘 학자의 파퓰리즘 이론” 거부감
한국, 정확한 통계자료 없어 불평등 연구 불가능


토마 피케티 파리 경제대 교수의 화제작 <21세기 자본>이 한국에 번역·출간되었다. 이 책은 등장하자마자 폴 크루그먼 등 ‘중심부 경제학자’들에게 전례 없는 상찬을 받으면서 단숨에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지금까지 나온 베스트셀러 중 가장 안 읽힌 책이 될 것”이란 조롱도 적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두꺼운 경제학 서적은 날개 돋은 듯 팔려나가는 중이다.


피케티 교수의 책 <21세기 자본>은 왜 이렇게 거대한 반향을 일으키는 것일까? 누구나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불평등의 문제를 방대한 데이터와 강력한 방법론을 통해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피케티 교수는 20세기의 매우 예외적인 시기를 제외하고 역사적으로 자본수익률(r)이 국민소득증가율 혹은 성장률(g)보다 높았다고 지적한다. 소위 피케티의 부등식(r>g)이다. 자본수익률이 국민소득증가율보다 크다는 말은 곧 자본 소유자들, 즉 부자들이 경제성장률보다 더 높은 수익을 올린다는 것이다. 더 쉽게 풀어보자면 피땀 흘려 일해서 번 돈이 아니라 기존에 쌓여있거나 물려받은 재산을 통해 벌어들이는 돈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내게 된다는 뜻이다. 그는 자본(capital)이 아니라 총체적 의미에서의 부(wealth)를 분석대상으로 삼는데, 부의 증가에 자산소득이 노동소득보다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향성을 바꾸지 않으면 점점 더 확대되는 불평등이 인류 전체의 재앙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에 따르면, 스탠더드앤드푸어스가 최신보고서에서 “심각한 불평등이 지속적 경제성장의 장애물”임을 인정했다고 한다. 리버럴과 좌파들은 원래 낙수효과론, 그러니까 부자들이 많이 벌어야 그 부가 흘러내려와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가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낙수효과론은 우파들에겐 ‘전가의 보도’ 같은 논리였다. 그런데 이제 우파들도 마냥 이런 논리를 밀어붙이기 어렵게 됐다. 수많은 실증자료들이 낙수효과론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부가 위로 빨려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오지 앉기 때문에 국민경제는 점점 더 악순환에 빠져든다. 부자들은 돈 놓고 돈 먹는데 여념이 없고, 중산층 이하는 돈이 없어 돈을 못 쓰니 경기침체에 빠지는 게 당연하다. 2011년 발표된 ‘한국에서 자산빈곤의 변화추이와 요인분해’라는 논문에서 이상은·이은혜·정찬미는 “자산의 전반적 성장에 의한 빈곤 감소효과보다 분배 악화에 의한 빈곤 증가효과가 훨씬 컸다”(1쪽)고 지적한다. 한 마디로 이제 높은 성장률에 기대 빈곤을 감소시키려 하는 건 부질없는 희망이라는 이야기다.


피케티라는 학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보다 흥미로운 건 피케티를 둘러싼 한국사회의 반응이었다. 특히 재벌과 재벌 산하 연구소, 친재벌 성향 경제학자들은 <21세기 자본>에 거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노골적인 반감을 보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은 피케티 교수 방한 직전 세미나를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21세기 자본>이 “1대 99의 대중 감정을 자극하는 주장”이며, 이 책의 권고대로 할 경우 “투자위축으로 소득분배가 되레 악화될 것”이라고 강변했다. 심지어 “71년생의 아들뻘 학자가 내놓은 논리”라고 비난한 학자도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 학자에게 “너 나이 몇 살이야?”라는 ‘한국식 꼰대질’을 저질러버린 학계의 수준도 안타깝지만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따로 있다.


그것은 <21세기 자본>을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데 적용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계급별 소득 및 자산 자료나 과세 자료가 제대로 산정되지 않았거나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된 데이터를 구할 수가 없다. 직관적으로는 <21세기 자본>의 내용이 지금 한국사회에 적실하게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체적인 데이터가 없으니 어떻게, 얼마만큼이나 적실한지를 알기가 어렵다. 이러한 데이터의 미비함 때문에 지금까지 나온 한국사회의 불평등 연구는 늘 먼 길을 돌아가야 했고, 투입한 노력에 비해 산출되는 결과물이 보잘 것 없었다. 소득세 자료를 이용해 소득집중도를 분석한 동국대 김낙년 교수의 연구 정도가 장기 통계자료를 활용한 불평등 연구로 손꼽히는 실정이다.


9월 18일 방한해 강연을 한 피케티 교수는 몇 가지 통계수치를 제시하면서 한국사회 경제 불평등의 심각성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이미 학계 뿐 아니라 대중에게 잘 알려진 수준의 논의로, 그리 깊이 있는 분석은 아니었다. 누구나 계급과 계층의 불평등을 이야기하지만 한국에서 그 불평등이 어떤 양상과 규모로 진행되어왔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한 사람은 드물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임에도 하지 못했다. 그건 한국에 피케티가 없어서가 아니다. 불평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줄 숫자들이 대부분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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