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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코트디브아르가 우승후보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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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코트디브아르가 우승후보인 까닭
  • 장수찬(교수, 목원대 행정학과)
  • 승인 2014.08.11 1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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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POLIS)이야기 | 평등주의자 축구공의 정치학
축구의 평등주의는 의외성을 낳고, 이 의외성은 다시 ‘축구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만든다. 축구가 이렇게 빨리 세계인의 스포츠로 자리 잡은 이유는 축구가 가진 평등주의 덕분이다.
축구의 평등주의는 의외성을 낳고, 이 의외성은 다시 ‘축구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만든다. 축구가 이렇게 빨리 세계인의 스포츠로 자리 잡은 이유는 축구가 가진 평등주의 덕분이다.

게임의 원시성, 인간에 평등주의 선사

공·공간만 있으면 가능, 룰도 3가지뿐

‘축구에선 모든 일 가능’ 믿음 심어줘

장수찬 교수
장수찬 교수

브라질 월드컵을 향한 세계인의 열정은 다른 행성의 외계인들이 부러워할만하다. 세계의 훌리건들은 축구를 향한 열정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온 몸을 문신으로 장식한다. 혹은 축구 스타를 신격화하고, 주술사를 동원해 제사를 집전하고 승리의 신을 부르기도 한다. 왜 축구는 지구촌 인간들을 흥분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잠 못 이루는 여름밤을 선사할까?

바로 축구가 가진 게임의 원시성 때문이다. 이 원시성이 인간들에게 평등주의를 선사한다. 축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구기종목이다. 크리켓 경기가 140쪽에 이르는 게임 룰을 가지고 있다면, 축구는 단지 3가지 룰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공에 손을 대지 말 것, 상대편 선수를 차지 말 것, 공보다 상대편 진영에 먼저 들어가지 말 것. 게임의 원시성은 돈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돈이 소요되는 다른 구기 종목들과 달리 공과 약간의 공간만 확보되면 가능한 종목이 축구다.

확실히 축구공은 부유한 나라만을 사랑하지 않는다. 축구만큼 세계 모든 대륙의 국가들이 GDP 규모나 개인당 수입(Per Capita Income)의 수준에 관계없이 골고루 참여하고 있는 종목도 없다.

축구의 역사를 둘러보자. FIFA 월드컵이 올림픽에서 분가해 독자적으로 개최된 것은 프로선수들에 대한 지위 문제 때문이었다. 제1차 월드컵 경기는 우루과이가 주최국이 됐다. 우루과이는 1924년과 1928년 올림픽 축구 토너먼트 우승자였다. 1930년은 우루과이가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따라서 우루과이만큼 최초 주최자로 정당성을 갖춘 국가는 없었다. 1930년 월드컵에 참여한 국가는 라틴 아메리카 7개, 유럽 4개, 북미 2개 고작 13개 팀이었다. 당시 FIFA 회장을 맡고 있었던 줄 리메(Jules Rimet)가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를 정치적으로 꼬드기지 않았더라면 유럽대륙이 빠진 월드컵이 될 뻔 했다. 4개 유럽 팀은 한 달간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줄 리메는 자신의 등산 가방에 월드컵을 넣고 4개 팀과 함께 대서양을 건넜다.

1936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2차 대회에 브라질 팀을 제외한 남미 팀들은 대거 불참했다. 한 달이 넘게 걸리는 대서양 항해가 큰 장애물이었다. 축구의 종주국 영국은 1920년부터 1946년 까지 모든 축구경기에 불참했다. 영국은 세계최강의 제국주의 국가로 전쟁을 하고 있었던 상대국들이 많아서 축구로까지 정치가 확대되는 것이 불편했다. 영국의 불참은 제2차 세계대전 후까지 계속됐다. 따라서 영국은 1930~1950년 사이, 즉 20년 이상 월드컵에 결석했기 때문에 축구 종주국임에도 불구하고 트로피를 한번 밖에 가져가지 못했다. 1938년부터 1950년까지 2차 세계대전으로 월드컵은 중단됐다. 히틀러는 올림픽과 월드컵을 유치, 세계만방에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논증해 보이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우루과이의 보이콧과 세계전쟁으로 히틀러의 의도는 무산됐고, 월드컵은 1940년과 1946년 두 차례에 걸쳐 열리지 못했다.

월드컵 토너먼트 방식은 1~2차 대회에서 대부분 확정됐다. 1차 대회에서, 참가국을 그룹으로 나누고 그룹 내부에서 상호 게임을 진행하는 방식이 확정됐다. 1934년부터 참가자격 티켓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게임이 진행됐다. 그리고 1982년까지 오직 16개 팀만 참여자격이 주어졌다. 그 후 1982년에 토너먼트 참여국가가 24개 팀으로 확대됐고, 1998년 대회 때부터 현재와 같이 32개 팀이 참여하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그러나 1982년까지 월드컵 예선 게임 참여국이나 참가자격 티켓을 확보한 국가들은 라틴국가들과 유럽 국가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1982년까지 유럽대륙과 남미대륙을 제외한 지역에서 2라운드까지 진출한 국가들은 미국(1930년), 쿠바(1938년), 북한(1966년), 그리고 멕시코(1970년)뿐이었다.

1966년 이전까지 아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은 월드컵에서 누락되어 있었다. 그러나 축구공의 평등주의는 빠르게 월드컵을 세계인의 경기로 만들었다. 1970년 대회에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의 절반가량이 참여했고, 1978년까지 냉전의 세계정치 구도를 이유로 불참해오던 중국이 1982년 최초로 월드컵에 참여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본선티켓을 획득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월드컵이 완전한 세계인의 축제가 된 것은 1998년 프랑스 대회에서부터다. 세계 절대다수 국가들이 예비 토너먼트에 참여했고 대륙별로 본선 참가 티켓이 배분됐다. 이제 더 이상 축구는 유럽인과 남미인만의 축제가 아니다. 1990년 카메룬, 2002년 한국, 2010년 가나가 4강에 안착할 정도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도 축구의 한축을 이루고 있다.

축구의 평등주의는 의외성을 낳고, 이 의외성은 다시 ‘축구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만든다. 축구가 이렇게 빨리 세계인의 스포츠로 자리 잡은 이유는 축구가 가진 평등주의 덕분이다. 월드컵은 인류의 잠재적 미래다. 가난한 아시아·아프리카 인들도 당당히 선진국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고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을 갖췄다. 나는 감히 축구공의 평등주의에 입각해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과 코트디부아르를 우승후보로 지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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