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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된 과거, 지금 이곳의 이야기
  • 황혜진(목원대 TV영화학부 교수)
  • 승인 2016.05.26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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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사회 | ‘역린’

지식과 담론 무장한 권력과 자본의 결탁 읽혀

윤리적 메시지, 역사 관통해 희망의 빛 던져줘

황혜진
황혜진

때 이른 꽃들이 봄날의 창창함을 앞 다투어 알리던 날, 참담한 사건이 일어났다.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속보와 때 늦은 사고 원인 분석의 홍수. 그 속에서 깊은 무력감에 빠져들거나 반복되는 참사의 이면에 놓여 있는 자본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하거나 상실에 대한 애도의 눈물을 감추면서 그렇게 봄날은 지나가고 있다. 개인과 공동체는 국가에 그 권리를 전적으로 위탁했다. 이에 따라 국가는 독점적인 물리력을 포함한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현 상황은 개인적 삶과 함께 국가를 상실했다는 느낌을 주기에 고통스럽고 나아가 역사에 대한 환멸마저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올 들어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던 한국영화 관객점유율을 단숨에 끌어올리고 있는 <역린>(감독 이재규). 영화는 정조 1년에 벌어진 정유역변을 통해 극한의 갈등을 살아냈던 사람들의 표정을 담아냈다. 그러면서 묘하게도 지금, 이곳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정조는 당쟁의 와중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그가 세손 시절 일기에 "두렵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다"고 적었음을 밝힌다. 노론으로부터 가해진 생명의 위협은 물론 왕권과 신권의 대립 속에서 친아들을 잔혹한 죽음에 몰아넣을 수밖에 없었던 할아버지 영조와 자신의 가문을 위해 남편을 외면했던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해 어린 이산이 가졌을 애증 어린 두려움이 절실히 느껴지는 구절이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정조의 치세는 조선을 통치했던 어떤 왕의 그것보다 개혁적이었다. 경전의 가르침을 실제에 구현하고자 했던 그의 시대에 애민(愛民)에 대한 모색이 넘치는 실학이 꽃 피었으며, 생산력은 전 시대에 비해 가장 높은 수준을 구가했다. 정조의 치세가 후대에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졌더라면, 이 땅에 근대가 좀 더 일찍 개화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마저 들지 않는가?

이런 까닭에 영화의 정서는 유교적 군주가 가질 수 있었던 최선의 형상을 갖춘 정조의 비애감이 이끌어간다. 그러나 진정한 비애는 정조가 아니라 철저하게 담합한 당대의 권력이 잔혹한 비인간의 얼굴로 힘없는 자들을 짓밟는 모순을 목도하는 데서 온다. 권력과 자본의 결탁은 무엇인가를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 생성되는 대신 자신의 존재를 무한으로 확장하기 위해 긍정적인 운동과 변화를 억제하는 악의 모습으로 현현한다. 은폐와 위장에 능하며 지식과 담론으로 무장한 이 힘은 역사에 편재하기에 간혹 맨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시간을 초월한 기시감을 주며 우리를 절망에 빠트린다. 모순의 끊임없는 반복이 아닌가!

그러나 이 모순이 초래한 위험에 노출된 채, 역사의 매 국면마다 죽음의 위기에 내몰렸던 민중은 고통이 가르쳐준 생명력을 무기로 살아남았다. 승자의 역사에서 배제된 이름 없는 사람들이 써 온 또 하나의 역사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슬픔을 딛고 강인한 카리스마를 갖춰가는 청년 정조뿐 아니라 살수로 키워질 수밖에 없었던 버려진 아이들, 아픔의 역사를 살아냈던 이 땅의 민중들이다.

<역린>에는 살수로 키워진 갑수와 을수, 월혜가 등장한다.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한 노론 벽파는 정조 시해를 도모하기 위해 갑수는 정조 곁을 지키는 환관으로, 월혜는 세답방 나인으로 들여보낸다. 갑수가 동생처럼 여기던 을수 역시 조선 최고의 살수가 되어 정유역변에 동원된다. 그러나 갑수는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왕이 자신에게 보이는 신뢰와 연민을 바탕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자신이 권력의 탐욕에 이용당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한 월혜 역시 왕에게 역변을 알림으로써 복종의 굴레를 끊는다. 을수가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왕에게 칼끝을 겨누는 순간, 어쩌면 서로 평생을 그리워했을 갑수와의 죽음을 건 대결이 펼쳐지는 장면은 두고두고 영화의 서사를 원망하게 한다. 진실은 언제나 너무 큰 대가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서가 아닐까?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애정으로 행간을 채울 수 있다면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우리의 삶이 곧 역사라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역린>은 윤리에 대한 영화로 읽혀질 것이다. 국가에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정치적 윤리가 아니라 각자의 삶이 실천해야 할 윤리! 정조의 명에 따라 갑수가 읊었던 중용 23장.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계를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를 관통해 절망 가운데 가녀리지만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 구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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