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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타이밍
  • 송길룡(영화칼럼니스트)
  • 승인 2016.05.26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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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노트 | ‘아메리칸 허슬’

70년대 배경 속 현대 미국인 신경증적 단면 표현

송길룡(영화칼럼니스트)
송길룡(영화칼럼니스트)

아주 흥미롭고 매력있는 영화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그뿐인가.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기도 하다.

작년 2월에 국내에서 개봉했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라는 영화를 나는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최근 급격히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는 여배우 제니퍼 로렌스 때문에 관람했었다. 좌석 깊숙이 몸을 누인 채 그윽한 눈길로 관망하다가 점점 영화 속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면서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전진자세로 스크린을 향했던 그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누가 만들었을까. 다음번에도 나를 사로잡는다면 이 영화의 감독을 각별하게 생각하겠노라 다짐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니다. 딱 일 년 만에 과연 이런 순간이 도래했다. 최근 개봉한 <아메리칸 허슬>을 보고 나는 영화노트 앞장에 ‘데이비드 O. 러셀’이라는 이름을 굵직하게 써버리고 만 것이다.

부랴부랴 이 영화감독에 관한 정보들을 살펴보고 그가 그간 범상치 않은 작품 활동을 해왔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아니 자칭 ‘영화광’ ‘시네필’이라는 사람이 이미 세상은 다 아는 나름 유명한 그런 감독을 놓치고 있었다니! 귓가에 맴맴 거리는 귀신같은 핀잔들을 애써 외면하고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았다. 1994년 <원숭이 때리기>라는 장편 데뷔 이후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직전까지 6편의 작품을 내놓았는데 그중 국내 개봉이 이뤄진 것은 <쓰리 킹즈>(1999)와 <파이터>(2010) 두 편뿐이었다. 그것도 10년을 사이에 두고. "아하~ 관심을 갖기에는 관람기회가 너무 멀었구나."

영화정보를 자세히 보니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은 1958년생이다. 1963년생인 박찬욱 감독보다 5살 위다. 50대 중반이라~ 산전수전 다 겪고 알 만한 것은 다 알만한,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하는 데에 한창 무르익은 나이렷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작 <실버라이닝 플레이북>과 <아메리칸 허슬> 두 편만 놓고 봐도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심리적 자원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원숙한 연출력을 뽐낼 만했었던 것이다.

<아메리칸 허슬>의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은 적당히 자기만의 ‘도덕률’을 가지고 절박한 상태에 놓인 사람들을 등쳐먹고 사는, 남다른 수단을 갖춘 생계형 사기꾼이다. 어빙(크리스찬 베일)이란 이 사기꾼이 돈을 뽑아내는 방법이란 이런 것이다. 급전이 궁한 사람들에게 자신만이 아는 루트를 통해 목돈을 대출받도록 알선해줄 수 있다고 속이고 알선료만 달랑 챙겨먹는 것. 물론 이런저런 핑계를 얼마나 잘 둘러대는지 돈을 뜯긴 불쌍한 빈털터리들이 원망조차 들이대지 못하게 하는 데에 신묘한 솜씨가 있다. 아니 그런데 이렇게 죄질 안 좋은 인간에게 무슨 도덕률? "과욕은 일을 망친다!" 어빙은 적당한 선에서 미끼에 걸려든 물고기들을 풀어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무사히, 정말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건강하게 사기를 치고 돈을 꽤 모을 수 있었다.

문제는 도덕적으로 옳든 그르든 별 무탈한,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는 넉넉한 한 남자의 삶. 그것에 작은 균열을 일으키고 매혹으로 다가온 여자 시드니(에이미 아담스)에 홀딱 반한 어빙은 이후 그녀와 함께 듀엣으로 벌이는 사기 행각에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언제 어디서 서서히 위험이 다가오는지 까맣게 모르고 넋이 빠진 즐거움 속에 산다. 그러다 사단이 났다. 파렴치범 검거에 독이 오를 대로 오른 FBI 요원 리치(브래들리 쿠퍼)의 함정수사에 여봐란 듯이 걸려든 것. 리치는 자신이 기획한 더 큰 함정수사에 어빙과 시드니를 미끼로 삼게 되는데, 이 셋이 옥신각신 이끌어가는 웃지 못 할 뇌물정치인 소탕 대작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사태진전의 예측을 불허하며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일단 몇 마디로 영화 <아메리탄 허슬>을 정리해보자면, 비록 197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극을 전개하고 있지만, 능청스럽게 호연을 펼치는 주연배우들의 절묘한 심리묘사를 통해 자기통제력을 잃고 점점 더 상황의 우스꽝스러움 속에 부지불식간 자신을 내던져버리는 현대 미국인의 신경증적인 한 단면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평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다소 평이한 평가에 덧붙여 나는 의외의 지점에서 이 영화의 매혹을 느꼈음을 언급해야겠는데, 그건 이런 것이다.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될 때마다 그나마 자신의 도덕률을 의식하고 수습을 해보려고 하는 주인공 어빙은 주변인물들이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보이는 과잉 행동에 번번이 좌절당하곤 한다. 그러다가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결국은 어떤 설득도 어떤 회유도 국면을 전환시키기는 어렵다는 인식에 이른다. "과욕은 일을 망친다"라는 금언은 되풀이해봤자 헛된 도덕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용케 영화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비밀스럽게 탈출구를 모색해낸다. 바로 그때, 아무도 못 믿을 사기꾼이 동료 사기꾼에게 자신을 믿고 따라달라는 아이러니컬하면서도 진정어린 호소를 하는 순간의 정신적인 번득임!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는 송곳 같은 영혼의 명령!

영화 <아메리칸 허슬>의 감독을 영화작가로 추앙하며 내가 감탄해 마지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돈과 욕망에 부유하는 굴곡 없는 시간의 연속선 위에서 그것으로부터의 이탈을 가능케 할 미세한 정신의 빈틈을 간취하는 능력에 대한 경배! 그대들이여, 지금 당장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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