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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억5000만 년 전엔 같은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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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억5000만 년 전엔 같은 종족”
  • 정영오(한국일보 경제부장)
  • 승인 2014.01.25 17: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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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 | 늑대에게서 찾아낸 인간 영혼의 빈터
정영오 한국일보 경제부장
정영오
(한국일보 경제부장)

나는 좀처럼 읽은 책을 다시 꺼내 들지 않는다. 읽고 싶은 책을 채 읽기도 전에 더 읽고 싶은 책이 출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변치 않은 우리 집 책장에는 읽은 책보다 읽고 싶은 책들이 더 많다. 이런 형편이니 ‘다시 읽고 싶은 책’을 소개해 달라는 주문 자체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한참 책장을 훑어보다 한 권을 꺼냈다. <철학자와 늑대>. 2012년 말에 출판된 초판이다.

‘괴짜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일기’라는 부제 그대로 웨일스 출신의 근육질 철학자가 수컷 늑대 ‘브래닌’과 함께 살며 인간(저자는 ‘영장류’라고 부르길 더 좋아한다)을 늑대와 견주어 통찰하는 에세이다. 철학에 문외한이라 저자 마크 롤랜즈가 철학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진 사람인지 전혀 모른다. 다만 그의 철학이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서정적이라는 것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늑대가 인간 영혼의 빈터와 같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 늑대는 우리가 규정하는 인간의 모습 속에 숨은 이면, 즉 우리가 주장하는 인간이 아니라 실존하는 인간 그 자체를 보여준다. 우리는 늑대의 그림자 속에 서있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을 밝힌 대목이다. 알듯 모를 듯 유행가 가사처럼 들리지만 이건 100% 과학에 근거한 언설이다.

지구에 포유류가 등장한 2억5000만 년 전에는 인간과 늑대가 같은 종족이었다. 그 이후 진화라는 우연이 거듭되며 이렇게 다른 모습이 됐지만 그 진화의 흔적은 인간의 뇌와 늑대의 뇌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동물이면 모두다 진화과정상 파충류 이후 형성된 번연계를 뇌 한가운데 지니고 있다. 그 번연계가 공포와 분노, 증오와 쾌락을 조절한다. 누가 감히 인간과 늑대는 서로 공감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진화 가지 상에서 늑대와 갈라선 이후 인간의 조상들은 개별적 생존보다 무리를 이뤄 살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사회적 진화를 선택한 결과 인간은 ‘지구의 정복자’가 됐으며, 인간의 평균 수명과 건강상태는 야생의 늑대와 비교할 수 없이 양호해졌다.

하지만 그 대가 또한 만만치 않다. 영장류가 성공적으로 사회를 유지하고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늘 무임승차자를 찾아내고 처벌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에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가 자신을 공격하거나 지배하기 전에 그를 견제 혹은 제거하기 위해 다른 구성원과 연합하고 때론 배신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지략 싸움의 승자는 상대방의 숨은 의중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남보다 발달된 대뇌 피질을 갖췄을 것이다. 7000만 년 전 영장류가 등장해 사회를 만들고 키워나가기 시작한 이후 인간은 끊임없이 대뇌 피질을 발달시켜왔기 때문에 지금 생존해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늘 타자의 예기치 않은 배신이나 내가 만들어 놓은 거짓이 들통 나지 않을까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스스로 혹은 사회가 만들어 준 필터 또는 믿음을 통해 세상을 단순하게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려 한다. 저자는 "인간만큼 잘 속는 동물은 없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인간이 사회 속에 사는 한 근원적 불안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한번쯤은 대뇌 피질 한가운데 꽁꽁 숨겨둔 '인간 영혼의 빈터'를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에게는 수억 년 전 우리와 달리 최소한의 무리에 속하거나 혹은 혼자 살기를 선택한 늑대가 바로 그 빈터인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을 괴롭히는 선과 악, 행복, 고통, 죽음 등 실존적 문제에 대해 늑대가 던져 주는 해답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 해답을 이 글이 요약해 줄 것이란 기대는 버려라. 대신 그 중 내가 곱씹고 있는 대목을 소개한다.

인간의 시간과 늑대의 시간의 차이다. 저자가 보기에 인간은 언젠가부터 화살이 지나가듯 시간도 선형으로 흐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화살이 도착하는 지점을 결과로 생각하고 현재의 만족을 미래를 위해 미뤄둔다. 마치 죽는 순간 얼마나 많은 것은 잃게 되느냐가 성공한 인생의 척도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저자가 지켜본 늑대 브래닌의 시간은 원처럼 회귀한다. 브래닌은 반복되는 일상의 순간순간에서 만족과 행복을 찾으며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다. 누가 더 현명하게 살았는가.

지금 우리 집에는 ‘귤’이란 이름의 고양이가 살고 있다. 나머지 가족들은 귤의 우아한 걸음걸이와 조용하고 날렵한 도약을 지켜보며 감탄하고 행복해한다. 아마 귤과 인간이 한 종족이었던 수억 년 전의 추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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