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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철학자 됐을지 모를 제 멋에 산 낙천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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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철학자 됐을지 모를 제 멋에 산 낙천주의자
  • 정승태(침례신학대 종교철학)
  • 승인 2013.10.28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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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Portrai by Ludwig Sigismund Ruhl, 1815, ⓒwikipedia
Arthur Schopenhauer Portrai by Ludwig Sigismund Ruhl, 1815, ⓒwikipedia

우리는 인생을 제멋대로 살 수 있을까. 우리는 가끔 어떠한 사회적 관습이나 문화에 구속받지 않고 살 수 없을까를 꿈꾼다. 이러한 인생을 산 사람은 인류사에서 얼마나 될까. 하지만 철학자들 가운데 그렇게 살았던 매우 특이한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아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다. 한마디로 그는 제멋에 산 철학자다. 오늘날 그가 활동했다면 스타 철학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가치를 확실히 사람들에게 인식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그다지 연연해하지 않은 철학자다.

1788년 폴란드의 단치히에서 태어난 쇼펜하우어는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오만이 가득한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피노자는 1677년 2월 21일에 죽었다. 나는 1788년 2월 22일, 그러니까 그가 죽은 지 정확히 111년 후, 즉 100+100의 1/10년+100의 1/10의 1/10년 후에 태어났다. 또한 스피노자가 죽은 날짜에 1을 더하면 나의 생일이 된다." 철학자들 중 자신의 출생을 이렇게 표현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쇼펜하우어가 유일하다.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스피노자는 쇼펜하우어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성향의 철학자다. 스피노자는 광학 렌즈를 갈아 생계를 꾸려가면서 윤리적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명성을 거부했고 또 자신의 저술들조차도 익명으로 출판되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철학자다.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어떠한 겸손함도 거부한 철학자다. 그런데도 굳이 그가 스피노자를 들먹인 이유는 뭘까. 아마도 스피노자의 겸손함이 부러웠는지 모른다.

쇼펜하우어를 떠올리면 우리는 그가 마치 교만의 극치를 즐기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가치와 중요성을 드러내려고 무진장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겸손한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경멸한다. "사기꾼들이나 겸손하다"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는 쇼펜하우어는 "한심한 무능력자들이 자신의 하찮음에 대한 자각을 겸손으로 가장한다"고 확신한다. 말하자면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겸손은 시기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장점과 공적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덕목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자신만만한 표현인가.

그가 이렇게 자신만만한 표현을 일삼은 것은 아마 가문의 부유함과 성장배경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원래 쇼펜하우어의 가족은 네덜란드 가문이다. 그의 선조들은 상당한 명성과 부를 누렸고,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당대의 유명한 방문자들이 머무는 처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의 부친 또한 부유한 상인이었다. 어린 시절 쇼펜하우어는 부모님과 함께 많은 지역을 여행했으며 그것이 그에게 넓은 지역의 문화와 풍습을 일찍 배우고 습득하는 기회를 줬다. 아홉 살 때 프랑스에서 교육을 시작한 것을 보면 학습 능력도 남달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1809년 쇼펜하우어는 괴팅겐 대학 의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플라톤과 칸트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 의학에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철학공부를 마치고 예나 대학에 제출할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충족 이유율의 네 가지 근거에 관하여>라는 책을 써서 1813년에 출판했다. 괴테가 이 책을 상당히 칭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진 않았다.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1819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철학체계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 지식의 한계를 감안하면 나의 철학은 세계의 수수께끼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책이다." 마치 자신의 책에 대한 가벼운 비판이나 심지어는 야만적인 무시함에 대비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불후의 저작을 완성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정신병원에서 정상적인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비난으로 상처받듯이 대중이나 비평가의 견해에 의해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교수생활을 시작했지만 사실 학계는 그의 견해에 무관심했고, 또 자신의 강의시간이 헤겔의 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학생들의 눈에 그다지 띌 수 없었다. 이 일로 그는 헤겔과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신뢰하고 믿는 가치는 포기하지 않았다.

쇼펜하우어가 평생에 품었던 자신의 자부심과 가치에 대한 증거는 아주 많다. 그가 헤겔을 비난하는 대목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단적인 예가 1843년 5월 17일, 자신의 저서 출판을 거절한 출판인 브로크하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존경하옵는 귀하께서는 거절하신다는 답변을 저에게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 이 시대의 비루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헤겔의 난센스는 판에 판을 거듭하고 100면의 둔재들은 자신들의 쓰레기 같은 철학적 잡담이 도서박람회 때마다 출간되므로 독자들에게서 돈을 벌어 가면서 그런 짓을 하는 반면 제 평생의 노고가 담긴 책을 위해서는 출판사가 인쇄비도 못 내놓겠다고 할 정도가 되었단 말입니까? 그런 것이라면 훗날 제가 쓴 모든 것을 반갑게 품에 안을 세대가 올 때까지 저의 저작들을 출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세대는 꼭 올 것입니다."

평상시에 "철학으로 먹고사는 철학교수들보다 철학에 더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쇼펜하우어는 철학자들은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사상을 가르치지 않고 자신의 말과 조야한 생각을 개입하고 가르침으로서 철학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믿었다. 이처럼 그는 정말로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오만의 극치를 보이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독특하고도 흥미로운 철학자임에는 틀림없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평가에서 사람들은 그를 염세주의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 같은 평가는 잘못되었다. 그는 염세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숙명론자로 평가되어야 한다. 우리가 노력을 한다고 해서 일어날 필연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길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그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그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고 주장한다. 이 문장은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세계는 왜 나의 표상일까. 존재가 지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는 모든 내적이고 무의식적인 물질적 기능 속에 있는 대행자다.
인간은 오로지 의지뿐이다. 모든 자연의 힘들 속에서 활동적인 충동은 오직 의지와 동일시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삶을 "불리한 흥정"으로 정의한다. 삶에는 어떤 인간적인 고뇌가 있는 반면에 어떤 보상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것들 사이에는 어떤 불균형이 존재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어떤 것을 위해" 우리가 지닌 강점을 온통 다 발휘한다. 하지만 우리가 얻는 것은 없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삶은 일종의 사업과 같다. 사업의 결과는 인생에 들인 비용을 전혀 보충할 수 없다. 말하자면 거기에는 진정한 행복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을 얻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욕망이다. 이런 근거에서 쇼펜하우어는 "모든 개인의 삶은 실제로 언제나 하나의 비극일 뿐이며, 그 내용을 샅샅이 뒤져보면 그 특징이 하나의 코미디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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